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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ppy Flight Apr 30. 2020

좌절감 연속 '실습 비행'

- "도대체 훈련원에서 뭘 배운겁니까?"


1. 좌절감만 안겨준 '신입 승무원 실습 비행'


드디어 현장 실습(On the Job Training) 비행 날이다. OJT를 통해 그동안 훈련원에서 배운 것을 실제 현장에서 실습해볼 수 있다. 물론 이것도 최종평가에 포함되는 것으로 '승무원이 되기 위한' 마지막 테스트이다. 보통, 신입 승무원들은 '오프듀티 (OFF DUTY )로 실습 비행을 가는데, 우리는 일반직 경험이 있고, 직급이 있다고 (일반직에서 과장, 대리를 달고 옴. 업무 수행 능력은 신입 사원이지만, 외모나 나이는 전~ 혀 신입스럽지 않다) '온 듀티 (ON DUT)로 탑승하게 됐다.


온듀티로 가는 경우에는 승무원 한 사람의 몫을 제대로 수행해야 한다. 엊그제 교육을 수료한 어리바리 신입(?) 승무원들이, 어떻게 한 승무원의 몫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을까? 마치 '갓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에게 뛰라고 하는 것'과 같다고 할까? 그만큼 부담감이 컸고, 잘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다. 그래도 '승무원으로 비행기에 탄다'는 사실은 우리를 설레게 했다. 제일 인기가 많은 파리와 뉴욕... 두 스케줄은 받은 동기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OJT는 보통 2인 1조로 가게 되는데, 동기와 나는 오클랜드(뉴질랜드) 3박 4일 스케줄을 받았다. 비행 정보를 검색해 보니 승무원들은 오클랜드 체류 시 '옥시덴탈 (Occidental)'이라는 홍합 식당에 간다고 한다. 동기에게 "그 식당 홍합과 맥주 맛이 기막히다는데"라고 하니..'염불에는 뜻이 없고 잿밥에만 맘이 있다'라고 동기가 옆구리를 찔렀다. 그래도 비행을 마치고 동기와 홍합을 안주 삼아 시원한 맥주 한잔 할 생각을 하니 행복했다.


승무원에게 있어 듀티는 그 날 비행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 실습생의 듀티는 대체로 가장 쉬운 신문이나 화장실 용품 세팅이 주어지기 때문에 별 걱정 없이 실습비행을 준비했는데.. 웬걸 실습 비행 전날 밤, 듀티를 확인해 보니 기내 판매 및 갤리(CG)듀티였다.' 이게 꿈이야 생시야?' 볼을 한번 꼬집어 봤다. 아팠다. 정말 아팠다. 몸도 마음도.. 부담감이 밀려왔다. 이코노미 클래스에서 부팀장 다음으로 비중이 높은 업무, 비행 경력이 사오 년은 돼야 맡게 되는 업무, 십 년 정도 앙뜨레 (기내식)를 먹어야 잘할 수 있다는 바로 그 '기내 판매 업무'가 엊그제 신입 교육을 수료한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옥시덴탈'의 홍합이고 자시고 생각할 겨를이 없다. 입맛이 싹 달아난다. 오클랜드 비행 정보를 정리하고, 서비스/안전 매뉴얼을 읽어보고, 기내 판매 업무를 공부해 보지만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내일 잘할 수 있을까? 설렘과 긴장감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음 날, 출근 후 쇼업을 하고 사무장님과 선배 승무원들께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신입 훈련을 수료하고 오늘 현장 실습 비행을 가는 xxx입니다. 부족한 것이 많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어디서 이런 늙수그레한 신입들이 왔나?" 우리를 바라보는 선배 승무원들의 눈빛이 미덥지 않은 눈치다. 그래도 우리는 신입 승무원답게 방긋 웃으며 비행을 시작했다.


비행 브리핑을 마치고, 공항으로 이동, 항공기에 탑승했다. 선배님들이 갑자기 바빠지기 시작한다. 각자 맡은 듀티를 척척 해내는데, 나와 동기는 어디서부터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멍~ 하니 서있는 우리를 보고 한 선배 승무원이 답답한지 이것저것 시킨다. 정신없이 시간이 흐르고 승객 탑승이 시작됐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승객들, 이 짐 올려달라, 자리 바꿔달라, 물 한잔 달라 등 요구도 많다. 그럴수록 내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다. 얼굴에는 땀이 맺힌다. 아! 이건 내가 원하던 비행이 아닌데... 환한 미소로, 여유롭고 정중하게 승객들에게 탑승 인사를 하고 싶었는데...


이륙 후부터 본격적인 업무가 시작됐다. 갈수록 태산이다. 갤리 듀티는 아일 듀티를 리드하며 서비스를 준비해야 하는데, 내 업무도 익숙지 않은 신입 승무원인 내가 어떻게 선배 승무원들을 리드할 수 있겠는가! 갈팡질팡하는 내 옆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선배 승무원들의 한숨소리가 내 마음을 무겁게 했다.


최악의 사태는 기내 판매 때 발생했다. 기내 판매는 승무원과 승객 사이에 '돈'이 오가는 업무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처리하지 않으면 '쇼트 (판매 대금 부족)'가 발생한다. 이 중요한 업무의 총괄이 바로 나였다. 선배 승무원들의 도움을 받아 기내 판매 업무를 시작했지만 막상 승객 앞에 서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면세품 책자를 보던 승객이 '에스티로더 콤팩트'를 달라고 하는데, 나는 '에스티로더 콤팩트'가 어떻게 생겼는지, 포장은 무슨 색깔이니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콤팩트가 뭐에 쓰는 화장품 인지도 몰랐다. 남자 승객들이 밸런타인 21년을 달라고 하는데 어디서 그 물건을 찾아야 할지 몰랐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고 내 눈앞에 있는데도 승객이 원하는 물건을 찾는데 한참이 걸렸다.


물론 훈련원 때 면세품을 구경 (외우는 게 아니라 그냥 '구경'하는 정도였다)하긴 했다. 훈련원 전시품들은 보기 좋게 나열해 있어 그나마 구분하기 쉬웠지만 짧은 시간 동안 이백 개가 넘는 물건을 외우는 건 불가능했다. 여자들이 사용하는 화장품 종류가 그렇게 많은 지 처음 알았다. 기내에서는 수십 개의 케리어 박스와 수 대의 카트에 분산 배치되어, 승객들이 원하는 물건을 찾는 것은 모래 속에서 바늘 찾는것처럼 어려웠다.


옆에서 승객은 물건 달라고 기다리지, 앞에서는 선배 승무원이 "빨리 끝내라"고 눈치 주지... 유니폼 와이셔츠가 식은땀에 젖었다. 급기야는 시니어 승무원이 나를 보고 "도대체 훈련원에서 뭐 배웠어요? 방해만 되니 옆으로 빠져요" 가슴에 대못을 대고 박는다.


갤리 (승무원 근무 공간)로 들어오니 사무장님이 나를 보고 웃으신다. "할만해?". 이미 승무원들로부터 내 얘기를 들으신 것 같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 있나. 첫 비행이니깐, 너무 욕심 내지 말고, 배운다는 마음으로 해". 위로는 해주시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오클랜드까지는, 지금까지 온 것보다 더 가야 하고 오클랜드 비행 후에는 또 다른 비행들이 줄줄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비행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앞으로 닥칠 비행은 어떡하냐고! 언제까지 "저는 신입 승무원입니다. 아직 모르는 게 많습니다. 잘 부탁합니다"라고 굽실대며 다녀야 하냐고. 얼굴도, 직급도 신입이 아닌데.... 뭔가 조치가 필요했다.





* 우리 동기들은 온듀 티로 실습 비행을 다녀왔지만, 신입 승무원 현장 실습 비행은 오프 듀티가 원칙이다. 오프 듀티로 탑승하면 선배 승무원들로부터 여유 있게 업무를 배울 수 있다. 내가 좀 무섭게? 썼지만, 실습 비행을 가면 선배들이 엄청 챙겨주고 - 이것저것 먹으라고 - 잘해준다. 신입 승무원들도 곧 본인들과 함께 일할 동료이기 때문에 최대한 많은 것을 알려주려고 한다. 그런데... 나한텐 왜 그랬을까? 흑흑...(알고 있다. 나이도 많은 것이, 못 생기고, 얼굴도 빨갛고, 키도 작고.. 지금 생각해도 서글프다)


* 현장 실습 비행은 동기 1명과 함께 보통 3박 4일 장거리 비행 스케줄로 간다. 훈련원에서 배운 것들을 현장에서 직접 실습해 볼 수 있는 매우 유익한 시간이다. 백번 연습하는 것보다 한번 실제로 해봄으로써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 신입 승무원들에게 선배 승무원들이 바라는 것은 많지 않다. 승객에게 친절하고, 선배들에게 싹싹할 것. 그리고 "제가 하겠습니다"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줄 것. '곰'보다는 '여우'가 낫다.


* 얼마 전 유튜브에 올라온 <대한항공 신입 승무원의 첫 비행에 대한 이야기> 동영상이다. 현직인 나도 보고 울컥했다. 저 설렘, 저 긴장감... 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저 동영상 보고 나도 첫 비행의 추억? 악몽? 이 떠올랐다. 아직 신다영 승무원은 만나보지 못했다. 다음에 보면 '사인'해달라고 해야지. ㅎㅎ



저자권은 '대한항공'에 있으며, 신아영 후배님, 불쾌하시면 삭제할께요. 담에 커피 쏠께요. 사인해 주세요.


https://youtu.be/VM_vVJ_6V9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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