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n is not made for defeat"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대학 시절 영문학시간에 배운 표현이다. 헤밍웨이의 작품 '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에 나온다. 실습 비행을 다녀오면서 문득, 대학 시절 내 머리와 가슴을 때렸던, 꽁꽁 언 얼음을 깨뜨린 도끼와 같은 저 표현이 떠올랐다.
오클랜드에서 돌아온 날, 김포 공항을 나서니 눈이 오고 있었다. 오클랜드는 한 여름이었는데, 다시 겨울로 돌아온 것이다. "힘내자"라고 동기와 서로 격려를 하고, 비행 가방을 끌고 집으로 걸어가는데 (그땐 김포공항 앞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 누가 아는 체를 한다. "덕영 씨, 비행 다녀와?". 일반직에 있을 때 알게 된 사무장님이다. 실습 비행의 상처를 털어놓으니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 있어? 금방 적응할 거야" 격려해 주며 본인의 차로 집에까지 데려다주셨다.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지. 태어나자마자 날 수 있는 새도 없고... 그렇지만 그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다. 당장 이틀 쉬고 또 장거리 비행이다. 이번에도 기내 판매 업무를 맡을 것 같다. 이틀 동안 뭔가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두 번째 비행에서도 똑같은 실수를 할 것이고, 동료 승무원들에게 도움은커녕 폐만 끼치게 된다.
장거리 비행 다녀와서 피곤한데, 머릿속은 복잡하고, 다음 비행을 생각하니 잠이 오지 않는다.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전 비행의 실수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문득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그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거야!"
여기서 '그분'을 '그분'이라고 칭하는 것을 이해해 주길 바란다. 그분의 성함을 이곳에 쓰는 게 부담스럽다. 그분의 성만 들어도 다들 누군지 알 것이니, 다들 왜 내가 부담을 느끼는지도 알겠지?
그 당시 그분은 회사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을 정도로 파워가 대단했다. 잘 나가던 사람들도 한순간에 날개가 꺾였다. 몇 년 뒤에는 그분의 한마디("비행기 돌려"로 알고 있다)에 가던 비행기도 되돌아왔다. 우리회사의 땅콩 (원래는 '마카데미아넛츠'였다)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신, 그분은 당시 기내식/기판 본부장님이셨다. 내 첫 비행 때 좌절감을 안겨준 기판 부서의 최고 우두머리. 문득 그분이 생각났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분께 메일을 보냈다.
"안녕하십니까! 본부장님, 신입 승무원입니다. 엊그제 첫 비행으로 오클랜드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맡은 업무는 기내 판매였습니다". 이하 긴 메일 내용을 요약하자면
- 첫 비행에서 기판 업무를 맡았는데, 기판 물품이 익숙지 않아 어려웠다.
- 물품들이 익숙해지도록 기내 판매 물품 세팅장에 가보고 싶다.
- 우선 메일로 상황을 말씀드리고, 오후에 직접 전화하겠다...
어디서 그런 무모한 용기가 나왔는지, 밤샘 비행으로 잠을 못 자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감히 신입 사원 주제에 회사의 최고위층에게 메일을 보내다니 ("당장 회사 나가"라는 소리를 들어도 싸지!), 말 그대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행동이었지만, 그만큼 내 마음은 절박했다.
한잠 자고 오후에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기까지 얼마나 가슴 떨리던지... 잠시 후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내식 부서 팀장님이셨다. 이미 상황을 알고 계신 듯, 언제든 사무실에 한번 들리라고 하신다. 나는 바로 옷을 갈아 입고 택시로 십분 거리인 본사로 갔다.
기판 부서로 찾아가니 팀장님이 그분께 안내해 주신다. 그분은 나를 보더니 환하게 웃으신다. "이덕영 승무원, 반가워요. 메일 잘 받았어요". 그러더니 팀원들을 향해 한 말씀하신다. "잠깐 주목! 앞으로 여기 이덕영 승무원이 원하는 대로 다 해 주세요. 열심히 기내 판매해줄 승무원이니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시기 바래요". 부서 사람들이 이게 웬일인가? 싶은 표정이다.
본부장님의 명령이니 나머지는 일사천리다. 팀장님이 이틀 동안 기내 판매 세팅장 견학 예약을 잡아주셨다. 점심도 준단다.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하라고 하신다. 동기들을 소집했다. 그들도 실습 비행을 다녀온 후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틀 동안 기내 판매 세팅장에 가서 기내 판매 물건들이 익숙해질 때까지 하나하나 만져보고, 꺼내보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리고 며칠 뒤 장거리 비행을 갔다. 내가 맡은 업무는 역시나 갤리에 기내 판매. 여전히 익숙하진 않았지만, 첫 비행만큼은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온전히 내 몫의 업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면 좋겠지만, 아직은 부족했다. 그렇지만 첫 비행보다는 조금 익숙해진 느낌이다. 그렇게 나는 매 비행, 조금씩 나아지고 있었다.
민음사와 더클래식 출판사 책을 가지고 있다.
* 노인과 바다 (The old man and the sea)는 내 인생 책이다. 포기하고 싶을 때, 달아나고 싶을 때마다, 다 잡은 청새치를 상어가 다 뜯어먹을때까지, 끝까지, 그물을 놓지 않았던 산티아고를 생각한다. 집에는 3권의 '노인과 바다' 책이 있다. 한 권은 보통 사이즈, 한 권은 손바닥 사이즈, 한 권은 중지 손가락 (Fxxx U!) 사이즈다... 보통 사이즈 책은 집에서 읽는다. 손바닥 사이즈 책은 외출할 때 가지고 다닌다. 중지 손가락 사이즈 책은 비행기에서 읽는다. 서비스가 끝나고 기내 조명이 다 꺼졌을 때.... 승무원들도 교대로 쉴 때, 손가락 만한 사이즈의 '노인과 바다'를 꺼내 침침한 기내 조명에서 조금씩 조금씩, 한 문장 한 문장, 곱씹으며 읽는다. 좋은 문장을 만나면 냅킨에 필사한다. "Man is not made for defeat" (인간은 패배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문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