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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ppy Flight May 02. 2020

잊지 못할 비행 (3) ㅡ 미국 뉴욕

- 응급 환자 발생, 앵커리지로 회항하라! -


1. 항공사 승무원의 역할


'승무원'하면 대부분 세련된 유니폼과 입가의 은은한 미소, 그리고 우아한 기내 서비스를 떠올린다(고 적으면서 떠올리기를 강요하고 있다). '저렇게 약해 보이는 몸으로 (물론, 우람한 여승무원도 있고, 연약한 남승무원도 있다) 비상시에 승객들을 도와줄 수 있겠어?' 의심의 눈초리로 승무원을 바라보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지난번 아시아나 샌프란시스코 사고 때, 그리고 대한항공 하네다 사고 때 승객들을 사고 항공기로부터 안전하게 탈출시킨 승무원들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승무원들은 평소 안전 훈련을 통해 긴급 상황 대처법을 몸에 익히고 있다. 승객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모시는 것, 그것이야말로 승무원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승무원의 역할은 비상 상태 시 빛을 발한다. <출처 : 구글>






2. "응급 환자 발생, 앵커리지로 회항하라!"


뉴욕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였다. 그때 나는 항공기내 안전과 서비스를 책임지는 사무장 업무를 맡고 있었다. 지상에서 승객 탑승이 완료되면 항공기 문을 닫기 전에 나는 항상 기내를 한 바퀴 도는 습관이 있다. 지상 직원은 빨리 문 닫고 가기를 원하지만, 기내를 돌면서 동료 승무원들에게 승객 탑승 시 '특이 사항은 없었는지, 내가 해결해 줄 문제는 없는지' 묻곤 한다. 또 오늘 탑승한 승객들을 대충 흩어보며 그날의 비행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을 하곤 한다.


- 음! 오늘은 학생 승객들이 많으니 컵라면 찾는 승객들이 많겠군. 컵라면 서비스할 때 화상 입지 않도록 주의해야겠군.


-저쪽 단체 승객들이 좀 시끄럽군. 주변 승객들이 불편하겠는걸.


- 음! 35C 할머니 승객이 혼자 타신 거 같은데 비행 중 잘 보살펴 드려야겠군.


- 음! 47 열에 아기를 데리고 탄 엄마 아빠 승객들은 초보 부모 같군. 아기가 울면 내가 재워줘야겠는걸.


그날도 문을 닫기 전 기내를 한 바퀴 도는데 30G (10년도 더 된 기억인데 좌석번호까지 기억하고 있는 이 집요함)에 앉은 40대 한국인 여자 승객이 좀 특이해 보였다. 옆의 외국인 모녀와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데 목소리가 크고, 제스처가 과장된 것이 눈에 띈다. 또, 기내 선반에서 가방을 내리는 행동이 왠지 불안하다 싶었는데 역시나 가방을 바닥에 '쿵' 하고 떨어뜨린다. 내가 도와주러 갔더니 "호호호!" 웃으며 "괜찮아요! 괜찮아요!" 혀 짧은 발음을 하시는데 '미국에서 오래 사셔서 그런가? 교포인가? 발음도 특이하고 사람도 특이하네' 생각이 들었다.


비행을 오래 하다 보면 소위 '촉'이라는 것이 생기는데, 이는 '편견', '오해'와 동의어다. 아무튼, 오늘 비행에서는 '저 승객을 주시해야겠군' 혼자 생각하며 해당 구역 서비스 승무원에게도 30G 승객에게 특이 사항이 발생하면 보고해 달라고 했다. 이후 항공기 문을 닫고, 정시에 이륙하고 순항 중에 기내 서비스가 시작됐다. 나는 프레스티지 클래스에서 근무하면서도 그 승객에 대한 껄끄러운 느낌에 가끔씩 이코노미 클래스에 가서 별일 없음을 확인하곤 했다.


그날은 프레스트지 클래스에 승객이 별로 없어 서비스가 일찍 끝났다. 동료 승무원들에게 마무리를 부탁하고 이코노미 클래스로 갔다. 그 여자 승객은 오른쪽에 앉아 있었고 나는 승객의 건너편 왼쪽으로 가서 해당 구역 승무원과 서비스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몸은 왼쪽에 있지만 수시로 오른쪽의 그 승객을 흘깃흘깃 쳐다봤다. 서비스가 다 끝나고 승무원들이 갤리 (승무원 근무 구역)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아까 그 승객이 앉아 있던 자리 부근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 한국인 승객이었다면 '아악~' 했을 텐데...

* 외국인 승객은 '오마이 갓! 으로 비명을 질렀다.


나는 나는 듯이 (비행기도 날고, 나도 날고) 비명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갔다. 탑승할 때 내 '촉'이 이상을 감지했던 바로 그 승객이었다. 옆의 외국인 모자 승객은 한국인 여자 승객을 쳐다보며 연신 오마이 갓, 오마이 갓을 외친다. 무엇이 승객으로 하여금 '오마이 갓'을 연속으로 외치게 했을까?


가보니 한국인 여자 승객이 외국인 여자 승객에게 기대어 쓰러져 있었다. 입은 거품을 물고, 눈동자는 흰자만 보였다. 순간 나는 그것이 우리가 뇌전증 (간질이라고도 부른다) 임을 알았다. 그때까지 두 번, 뇌전증을 앓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처음 본 것은 군대에서였다. 사병들 앞에서 장교 한 명이 한창 훈계를 늘어놓다가 갑자기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쓰러졌다. 입에 거품을 물고, 눈동자는 돌아가고...누군가 '간질'이라고 했다. 장교는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몇 달 후, 병원에서 바로 제대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두 번째 목격은 버스에서였다. 한 승객이 버스에서 내리다가 갑자기 쓰러지더니 역시나 입에 거품을 물고 눈동자가 돌아갔다. 바닥에서 수 분 동안 몸을 비틀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닥에서 다시 일어나 먼지를 털고 버스에서 내렸다.


지금 내 앞의 이 승객도 똑같은 모습이었다. 나는 급히 승무원들을 호출했다. 부사무장에게는 기장님 보고를, 시니어 승무원에게는 기내 의사 호출을, 나머지 승무원들에게는 기내 응급 장비를 가지고 오라고 명령(!)했다.


뇌전증 승객에게 승무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승객의 몸이 뒤틀리는 도중에 호흡 곤란이 발생하지 않도록, 외상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변을 치우고 지켜봐 주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승객이 정신을 차렸다. 주의가 흐트러지고, 주변 승객들이 모두 본인을 쳐다보는데 정작 본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표정이다. '왜 내 앞에 잘생긴 남자가 서있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신다.


"어디 불편하세요? 괜찮으세요?" 물어보니 "괜찮다"고는 대답하는데 나는 왠지 불안한다. 옆의 승객들을 다른 자리로 옮겨 주고 승객을 자리에 눕히는데 승객이 다시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두 번째 발작이 시작된 것이다.


승무원의 기내 방송을 듣고 외국인 의사와 한국인 의사가 나타났다. 의사 승객들에게 환자의 상태를 설명하니 외국인 의사가 'epileptic seizure'라고 말한다. 마침 환자 승객이 발작에서 돌아왔다. 평소 불편한 곳은 없는지, 먹는 약은 없는지 물어보지만 승객은 정신을 못 차린다. 의사 승객의 조언에 따라 우리는 환자 승객을 퍼스트 클래스 좌석으로 옮겼다. 그날은 퍼스트 클래스에 승객이 없었다.


환자 승객이 퍼스트 클래스 좌석에 앉자마자 세 번째 발작이 시작됐다. 다행히(?) 두 명의 의사 승객이 있어 승무원은 옆에서 보조 역할을 수행했다. 두 분의 의사 승객이 전공분야가 다른 듯, 뜻은 알 수 없지만 환자 승객에 대한 처치 방법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는다. 환자 승객 옆에는 의사 승객들이 언제든 사용할 수 있도록 기내 탑재되는 의료 기구들, 즉 AED (Automatic External Defibrillator, 심장제세동기), FAK (First Aed Kit), EMK (Emergency Medical Kit) PO2 Bottle 등을 총집합시켰다.


나는 조종실로 들어가 기장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위성전화를 이용해 회사 사내 의사 선생님께 자문을 구했다. 사내 의사 선생님은 몇 가지 의학적 조언을 해주셨지만, 우리는 그때 태평양 상공을 날고 있었고, 한국은 너무 멀었다.


조종실에서 나와 환자 승객이 있는 곳으로 가니 상황이 더 심각해져가고 있었다. 환자 승객은 수 분 간격으로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처음에는 발작 후 정상으로 돌아오곤 했었는데, 이제는 혼수상태에서 발작을 일으킨다. 의사 승객들이 의료도구에서 호흡 장비를 꺼내더니 승객의 입을 벌려 관을 삽입한다. 산소 주입을 위해서란다.


그때 기장님이 상황 파악을 위해 조종실에서 나왔는데, 상황을 보시더니만 'Divert (회항)' 하자고 하신다. 의사 승객들도 이대로는 한국까지 못 간다고,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가야 한다며 기장님을 재촉했다.


기장님이 확인해 보니 회항을 위한 가장 가까운 공항이 앵커리지 국제공항이란다. 30~40분 정도 걸린다는데, 최대한 빨리 가겠단다. 나는 전 승무원을 호출해서 '회항'준비를 시켰다. 그리고 승객들에게 기내 방송을 실시했다.


"손님 여러분, 기내에 응급 환자가 발생하여 우리 항공기는 앵커리지 국제공항에 긴급 착륙하겠습니다. 앵커리지 국제공항까지 비행시간은 앞으로 약 40분입니다. 승무원들의 착륙 준비에 적극 협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기내 서비스가 끝나고 기내 조명을 모두 끈 채 승객들은 휴식을 취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갑자기 회항을 한다니, 기내가 술렁거린다. 의사 승객을 찾는다는 승무원들의 기내 방송을 듣고 환자가 발생했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회항까지 할 정도로 응급 상황인지는 몰랐다는 표정이다.


그때까지 앵커리지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 갈 수도 없었다. 정기 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앵커리지를 들렸다가 뉴욕을 갔다고 한다. 앵커리지에서 체류하면서 빙하라든지, 오로라를 보러 다녀왔다는데.... 우리는 지금 생명을 구하기 위해 간다.


앵커리지 국제공항에 도착하니 미리 연락을 받고 대기 중인 공항 응급 구조대가 기내에 진입했다. 의사 승객 두 분은 그때까지 앰부백'을 이용하여 환자의 호흡을 붙잡고 있었다. 착륙 때도 벨트를 메지 않고, 자가 호흡이 어려운 환자 승객에게 산소를 '수동'공급했다.


환자 승객은 앰뷸런스로 병원으로 옮겨지고, 항공기는 재급유를 한 후 다시 이륙했다. 뉴욕에서 인천까지 보통 15시간 정도 걸리는데, 우리는 거의 20시간이 걸려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비행기가 늦게 도착했어도 승무원에게 뭐라고 하는 승객은 한 명도 없었다. 생명을 구하기 위한 항공사(라고 쓰고 승무원이라고 읽을 것!)의 발 빠른 조치에 대해 다들 "고생했다. 대한항공 최고! 엄지척!"한 말씀씩 해주셨다. 내 인생 최장의 비행이었지만, 승객들의 격려와 칭찬 비타민을 먹고 나니, 피곤한지 몰랐다.


항공기 문을 여니 지상 직원들이 도열해 있었다. 직원들은 지연 도착에 대해 승객들에게 사과를 드리고, 다른 항공기로 갈아타는 승객들을 신속히 이동시키고, 그리고 비행 중 최선을 다해 환자 승객을 돌보와 주신 두 분의 의사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와 선물을 드렸다.





며칠 뒤 앵커리지에서 연락이 왔다. "떡사마, 앵커리지 왔었네?" 입사 동기 맹! 이었다. 맹이 앵커리지에 근무하고 있었던 건 알고 있었지만 우리가 회항한 시간은 그녀가 자고 있을 새벽이었기에, 그리고 계획에 없었던 회항이었기에, 연락 같은 건 생각조차 못했다. 다음 날 맹이 출근해서 전날 회항한 비행기에 대한 보고서를 보다가 내 이름을 보고 연락해 온 것이다.


맹의 연락에 따르면 승객은 사흘 정도 혼수상태로 병원에 누워있다가 건강을 되찾고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셨다고 한다. 승객 상태가 궁금했었는데, 소식을 들으니 안심이 되었다.


요즘도 나는 비행기 문을 닫기 전 기내를 한 바퀴 돈다. 빨리 문을 닫고 떠나길 바라는 지상 직원의 따가운 눈초리가 등에 꽂히지만, 한 바퀴 도는데 3분도 걸리지 않는다. 3분 동안 이 승객, 저 승객 흩어보며 오늘 비행에 대한 갖가지 상상을 해본다.


- 38열의 러시아 승객들, 비행 중에 술 많이 먹나 지켜봐야겠는걸...


- 50C에 앉아 있는 검은 옷의 여자 승객, 왜 울고 있지? 애인하고 헤어졌나?


- 48D에 앉은 외국인 승객, 한국어 책을 읽고 있네? 한국어 배우나? 나중에 말 좀 걸어봐야겠다.


- 47열의 아기 승객. 너무 귀엽다. 울면 내가 봐줘야지... 깍꿍~      






* 얼마 전 인터넷에 '죽어가는 승객을 살린 대한항공 승무원'에 대한 기사가 났다. 기내에서 호흡 곤란을 일으킨 일본인 소녀를 대한항공 승무원들이 응급조치로 살려냈다는 기사다. 승무원들은 법적으로 1년에 1회 안전 훈련을 받는데, 훈련 내용 중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응급환자 대처법'이다. 항공기 내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환자 승객의 유형과 대처법을 배우고, 숙련될 때까지 실습 (CPR, AED 사용 등)을 한다.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8/24/2019082490069.html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8/24/2019082490069.html <출처>



* 2017년에는 비행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와중에 버스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진 승객을 구해준 여승무원에 대한 기사가 난 적이 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oid=014&aid=0003932108



* 승무원들의 활약(?)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계속됐다. 터키 이스탄불의 한 호텔 카운터 앞에서 터키 소년이 의식을 잃고 쓰러진다. 이 호텔은 평소 대한항공 승무원들이 체류하는 곳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듣고 달려간 대한항공 승무원 세명이 응급조치를 취한 덕분에 어린이는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711171501001




* 항공기 안에서 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유니폼을 입고 있건 말건, 응급 상황에서 사람의 생명을 구한 동료 승무원들의 미담을 볼 때마다 마치 내가 그런 선행을 한 것처럼 뿌듯함을 느낀다. 승무원이 되고 난 후부터 나도 집 밖을 나서면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어디 쓰러지는 사람 없나? 내 심폐 소생술이 필요한 사람 없나?. 한 명만 걸려라. 내가 살려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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