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편 달랑게에게 양보할 해변은 없을까?
내가 주로 달랑게를 관찰하고 촬영하는 곳은 종달리의 조그만 서식지이다.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저수지 물이 빠져나가는 수문 옆으로 달랑게가 좋아할 만한 지형이 생겼다.
이 지역은 제주도 다른 지역에서는 보기 힘든 넓은 모래해안이지만 대부분 물에 잠기는 시간이 길어 달랑게가 살기엔 썩 좋지 않은 조건이다.
그래서 가장자리 지대가 조금 높은 곳 여기저기 조금씩 모여 사는데 그런 곳엔 구멍갈파래나 홍조단괴(석회조류가 굳어진 돌)가 많다.
그래서 이곳 수문 옆에 우연히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경사면에 매우 높은 밀도로 달랑게들이 산다.
내가 이곳에 주목하고 알리기까지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다가 작년 배수펌프장 공사를 할 때 달랑게 서식지 위로 수문을 낸다는 계획을 알고 환경단체와 훼손 우려를 알렸다.
그 결과 공사 계획을 수정해 수문 위치를 옮겨 시설이 완공되었는데 올해 상황을 살펴보니 새로 난 수문 부근 달랑게 서식지는 사라졌고 가장 많은 달랑게가 있는 곳엔 모래가 많이 쓸려나가 자갈이 드러난 곳이 많았다.
달랑게가 좋아하는 환경은 예전엔 흔했을 것이고 그만큼 달랑게도 많이 살았을 것이다. 달랑게가 해양보호생물로 지정되기 전엔 그냥 잡아서 볶아 먹고 튀겨 먹는 흔한 게로 여겨졌다.
그런데 하필 인간과 취향이 같을 줄이야!
대부분의 해수욕장은 달랑게가 살기 좋은 곳이다. 그중에서도 만조선 부근이나 바로 위에 순비기나무나 갯잔디, 사초류 같은 염생식물이 자라는 곳이라면 더 좋다. 그런 곳은 달랑게가 애써 파놓은 굴이 무너지지 않게 식물의 뿌리가 모래를 잡아 지탱해 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즐기는 해수욕이나 캠핑, 해변 걷기는 대게 달랑게의 머리 위에서 이루어진다.
그곳에서 달랑게를 못 봤다고 위안을 삼지 않길 바란다. 바로 당신 때문에 숨어서 나오지 않은 것이다.
여름을 전후해서 4, 5개월 열심히 먹고 양분을 축적해 번식해야 하는 달랑게에게 인간은 너무나 성가신 존재일 것이다. 전엔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가서 그나마 한적하게 사랑을 나눌 수 있었는데 요즘엔 밤 해변이 더 정신없다.
또 뜬금없이 맨발 걷기가 유행하면서 사시사철 밟아 재끼니 편히 쉴 날이 더 없어졌다.
마른 모래를 밟지 말고 물이 있는 곳을 걸으면 맨발 예찬론자들이 주장하는 접지 효과도 훨씬 좋을 텐데 젖는 게 싫어서 위쪽으로 걷는다.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에는 일명 코난비치라는 곳이 있다. 누군가가 멋대로 이름 붙여 SNS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 대단히 비밀스러운 곳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붐비는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부르기 싫은 이름이지만 마치 해리포터에서 볼드모트를 언급 할 때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자'라고 하는 것처럼 "코난비치인가 뭔가라고 부르는 곳"이라고 해야 의사소통이 된다.
그런데 아무도 관심 없지만 그 부근에는 달랑게가 많이 산다. 엽낭게도 많다. 엽낭게야 워낙 서식 범위가 넓으니 큰 피해가 없겠지만 가장자리로만 사는 달랑게는 정말 살기가 힘들다. 전엔 해수욕장으로 가치가 별로 없던 곳인데 이젠 웬만한 해수욕장 저리 가라 할 만큼 사람이 몰린다. 당연히 주차나 편의시설도 부족하고 불편하다.
어떤 이는 자기 별명이 붙은 해변이 생겨 우쭐할 테고 또 누군가는 유명한 곳에 가서 인증샷을 남겨 즐거울 테지만 이젠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한적한 해변을 찾기 힘들고 달랑게가 맘 편히 먹고 자손을 만들 곳이 남아있지 않다.
바다거북, 돌고래가 그물에 걸려 죽어가는 것엔 마음 아파하면서 달랑게에게 해변 하나쯤 양보할 아량은 어디서도 찾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달랑게해변으로 이름 지은 바닷가가 하나쯤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