뭇 직장인들의 로망이 아닐는지.의원면직(공무원으로서의 자진 퇴사)을 결심한 이후 나는 퇴직 뒤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수동적이던 몇 년간과는 다르게 직장 생활에 주도적 입장이 되어보기로. 옳다고 여기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실행해 보기로 했다.
그래도 명색에 교사인데 교육을 뒷전으로 여겨버린다거나 동료 교사들에게 피해를 끼쳐가며까지 무언갈 누리는 것은 삼가려 애썼다. 적어도 교직에 사명을 두었던 시절에 부끄럽지는 않아야 하니.
의원면직을 앞둔 한 해를 보내며 누린 소소한 일탈들을 아래에 적어보겠다. 타인의 감정이 제1 잣대였던 '만년 예스맨' 출신으로서는 이래저래 용기를 냈던 연도가 아니었나 싶다.
1.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회식이라는 행사는 직장생활 몇 년 차쯤에야 재미있어지는 것인지. 성향에 따라 편차가 크겠지만 적어도 나는 그 재미를 느끼기 전에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독자님들은 어떠실는지.
젊다는 이유로 다수가 기피하는 사람의 옆자리에서 회식을 치르는가 하면 2차, 3차 자리 필참을 강요받기도 하고 각종 유흥 자리에서의 광대 역할을 강요받기도 하는. 비단 초임기 교사가 아니더라도 젊은 직장인이라면 언제 겪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우리의 회식 문화가 난 그리 좋지 않았다.
진솔한 친분 없이 기계적으로 술과 대화를 소비하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를 끝까지 안고 가고 싶지는 않았기에, 처음 소소하게 용기 내어 본 일은 회식 일찍 탈출하기였다.
'저 먼저 가보겠습니다.'
술을 마시지 않고, 불편한 사람 옆자리에도 앉지 않고, 잠시 자리만 지키다 일어나며 말해보았다.
'저 선생님은 회식 자리에 웬만해선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구나.'
동료 선생님들이 그리 여겨준 한해간 상당한 마음의 평화를 누렸다.
2. 죄송하지만 그건 못 해드리겠습니다.
교직 사회는 이상하리만큼 정으로 돌아가는 집단이다. 대부분 '착한 아이들'이 성장해 자리 잡은 직장이어서려나. 그래서인지 정해놓은 원칙이 있더라도 개인적인 부탁과 요청의 힘이 앞서는 기형적인 느낌을 받곤 한다.
나는 올해 담임교사직을 맡지 않고 교과전담과 업무부장직을 맡았다. 담임 수업이든 교과전담 수업이든, 여러 학사 일정에 치이다 보면 수업 결손이 생길 때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우리 학교는 학교 행사로 빠지는 수업이 있을 경우 추가적인 보강수업을 실시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세워져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한해간 정해진 교과 시수보다 적게 수업하는 경우는 없다. 학사일정들로 중간중간 수업 결손이 생길 것을 예상해 애초에 전담교과군 수업 시수를 초과해서 계획해 놓기 때문이다.
이런 중에도 보강수업을 요청하는 선생님들이 계신다. 나도 담임교사직을 4년 겪었기에 그 마음 이해되지 않는 바는 아니나, 너무 당연하게 요구하시는 분들 앞에서는 흔쾌한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간의 마냥 사람 좋았던 모습을 내려놓으며 단호해지기가 쉽지는 않았다. 고민 끝에 용기 내어 말씀드렸다.
"죄송하지만 그렇게는 못 해드릴 것 같습니다 선생님."
3. 이번엔 제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몇십 년의 교직 생활을 겪은 교사가 관리자(교장, 교감)가 된다. 그간의 노하우를 축적하고 계시기에 배울 점 아흔아홉 가지가 있지만 가끔 한 가지씩은 옛 답습에 불과할 때도 있다. 실례되는 말씀이지만 몇십 년간 고집도 축적된 경우가 많으시기에 교사와 관리자의 의견이 다를 때는 관성적으로 관리자의 의도대로 흘러가며, 관료제 사회에서 사실 당연하기도 하다. 하지만 아닌 것을 아니라고, 비효율적인 것을 비효율적이라고 한 번쯤은 강하게 이야기해보고 싶었다.
"왜 교사가 학생들을 자차로 인솔해야 합니까? 전 겁이 나서 못하겠습니다."
"이런 형식적인 절차 없이도 운동회는 충분히 재미있습니다."
"우리 학교 애들이 교육청 들러리도 아니고, 이런 자질구레한 행사에 왜 필참해야 합니까?"
어느 말 하나 두근대지 않을 때가 없었지만, 내 의견이 관철되었을 때는 더없이 뿌듯했다. 내 의견으로 인해 업무가 더 좋은 방향으로 갈무리되었을 때는 더욱이.
4. 오늘 오후는 할 일이 없어서요.
교사에게는 소소하지만 치명적인 직업적 단점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연가보상비'가 없다는 것. 그리고 연가를 쓰기도 힘들다는 것. 출근하지 않으면 업무만 미뤄지는 업종과는 다르게 내가 출근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등교하기 때문이다. 이는 누군가 우리 반 학생을 대신 맡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자연스레 교사에게 수업일 중 연가는 피해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복무규정에도 명시되어 있다. 단지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는 뉘앙스로 작동하는 규정들이 나는 썩 합리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연가보상비가 왜 없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불만을 토로하다 보니 부정적인 말이 길어져 죄송하다. 여하튼 '연가를 쓸 수 없고', '연가보상비가 없다'는 것. 이것이 핵심인데, 그래서 대부분의 교사들이 주어진 연가를 절반도 못 쓴다. 그마저도 연가 형태가 아닌 반차나 조퇴 형태로 사용해야 함이 현실이다.
내가 내어 본 소소한 용기는 이 방면으로도 향했다. 오후에 업무가 없는 날엔 어김없이 반차와 조퇴를 써보는 것. 내가 가진 정당한 휴가를. 농을 섞어, 4차 산업혁명에 접어든 현대 사회에서 '가짜 노동에서의 탈피'를 강조하는 것과도 맥이 이어진다고 할 수 있으려나. 여하튼 한해간 나는 당당해지기로 했다.
"오늘 오후엔 해야 할 업무가 딱히 없어서 일찍 퇴근해 보겠습니다."
5. 아파서 출근을 못 할 것 같습니다.
장염에 걸려 한 시간에 화장실을 네댓 번씩 갔을 때도 나는 출근했다. 개인적인 성실함을 뽐내려는 의도는 아니다. 교사 열 명 중 열 명이 아파도 출근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다. 어찌 그리들 헌신적인지. 교직 밖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사명감들이 떠날 때 되어서야 사뭇 존경스럽다.
아플 때 병가를 사용해 쉬어보기. 딱 한 번, 실제로 아프던 날 아침 교감선생님께 전화드려 말씀드렸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오늘은 병가를 쓰고 싶습니다."
5년이 넘는 교직생활 중 처음으로 아픈 날에 쉬어보았다.
6. 대신해주실 수 있나요?
매 학년도에는 업무들을 처리하느라 각종 위원회며 업무 추진단이 구성된다. 누군가들로는 이루어져야 하는 그 모임들이 소소하지만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내 고유 업무의 일환이라면 당연스레 납득하고 책임감 있게 참여해야 하지만, 내 업무가 아닌데 누군가는 해야 한다는 이유로 채워져야 하는 자리들이 있다. 불편한 공기를 만들 바에야 나 하나 귀찮고 말자는 마음이 늘 있어서였을까. 연차도 낮은 김에 눈치껏 내가 그 자리를 맡아버리곤 했는데, 마지막 한 번쯤은 다른 선생님들께 부탁해보고도 싶었다.
"혹시 이번에 위원회를 맡아 주실 다른 선생님 계실까요?"
교사들은 대체로 참 선하다. 내가 꺼려하니 감사하게도 누군가 기꺼이 맡아주신다. 아마 앞으로도 정과 눈치, 근무년수에 많은 것을 기댈 교직 문화가 어찌 참 불편하기도 아름답기도 하다.
지난 일 년간 자행하여 본 나름의 일탈행위들을 이래저래 떠올려 적어 보았다. 그 과정이 나름 후련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막상 글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와서야, 애당초 의도와는 다른 부분들이 눈에 밟혔다.
이건 일탈이 아니라 그냥 당연히 누려야 할 것들이잖아.
하나하나 나열하고 보니 '일탈'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없다. 죄다 당연한 것들 뿐. 고작 누군가와의 미움이나 언쟁을 피하고 싶다는 소탈한 도덕성이 금지하였던. 권리로 주어진 것들을 행사하는 사람들에게 '별난 교사' 낙인을 찍어댔던 우리의 문화에 별안간 씁쓸한 마음이 밀려왔다.
나는 배테랑이 채 되기도 전에 떠나는 젊은 교사다. 우리 중엔 나처럼 교직을 떠난 것이 아니라 세상을 떠난 젊은 아무개 선생님들도 계셨댔다. 비단 교사만이 아니라 아무개 사원, 아무개 대리, 아무개 주임.누구나가 될 수 있었던 아무개들. 가슴 아픈 직장인과 공무원의 현실이다.
백 번 받을 스트레스를 두세 번만 줄여도 극단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을는지. '내 누릴 권리들을 포기하는' 스트레스를 감수하는 우를 범하지 마시라. 내가 누릴 수 있다고 여기는 최소한의 것들이 어쩌면 결정적인 순간에 나를 살릴지도 모를 일이다. 존경하는 수많은 직장인 선후배님의 '동료 직장인'으로서 감히 부탁드리며, 오늘도 소명의식 하나로 당연한 것들을 인내하고 양보하셨을 대한민국의 선생님들에게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