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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수 Dec 16. 2023

교사였을 땐 왜 몰랐을까

의원면직을 앞두고서야 깨닫는 것들.

 혹시 운동장에 석회 라인을 그려 보았는가? 요즘은 라인이 표시된 최신 운동장도 많지만 내가 근무한 학교는 그러지 못했다. 광활한 모래바닥 운동장. 체육시간에 축구 수업이라도 할라 치면 날마다 라인을 그려야 하는 낭만 있는 운동장이었다. 건조한 날 운동장 수업을 하면 온 피부 푸석해짐은 덤이다.

 이 학교에서 2년간 체육전담교사를 맡았던 덕에 석회 라인을 그릴 때가 잦았다. 얕보았던 마음도 잠시, 초보자라면 뒤돌아 그어놓은 라인을 눈으로 확인하는 순간 얼굴이 빨개지고 만다. 누가 이런 삐뚤삐뚤한 축구장에서 경기하고 싶단 말인가. 발로 비벼 지우고는 처음부터 다시 그린다.


 7년 간의 교직을 내려놓고 뒤를 돌아보는 나의 심정이 이와 비슷하다.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자만하고 내가 다한 최선을 '선'으로 여겼다. 스스로를 능력 있다 판단했다. 동료 교사들에게 받는 평판도 그러함이 느껴질 때면 어깨가 으쓱하곤 했다. 그런데 막상 확인해 본 나의 걸음은 곧지 않고 이리저리 휘어 있었다.

 내 수업과 업무 능력에 자신만만하던 날들. 경력 있는 선배 교사들을 만만히 여기기도 했던. 풋내기를 겨우 탈출하려는 연차 즈음의 지금에선 글쎄, 그간 품은 속마음 누군가 안다면 얼굴이 빨개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돌아본 내 교직인생엔 풋내 없는 자취가 없었다.




 모집단이 크지는 않겠으나 대화 나누어 본 선생님들의 걱정거리는 대부분 '수업'이 아니었다. 학부와 임용고시 준비를 거치며 수업은 웬만큼 전문가가 되어 교사로 발령받는다. 그렇기에 스스로도 발령 때나 지금이나 수업에 있어서는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전문가라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반 아이들을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는 것은 나다'라는 확신이랄까. 아마도 대부분의 초등학교 교사들이 공감할 것이다.

 교사들을 괴롭히는 건 수업에서 파생되는 업무보다는 사람에게서 파생되는 업무들이다.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업무들. 예컨대 학생 상담, 학부모 상담, 갈등 해결, 민원 응대 같은 일들이다. 여태 '수업이 힘들어서 교사를 그만두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힘들어서 교직을 포기한 사람들의 퇴직 사유는 죄다 위와 같은 유형의 고충들과 연관이 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가. 교사 때든 예비 교사 때든 참 자주 듣곤 했던 질문이다. 여태껏 내 대답은 '그렇다'였다. 아이들을 좋아하고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던 내게 교사는 천직이기 때문에. 정확히는 천직이었때문이다.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이 몇 년간의 교직생활을 겪고는 바뀌었다. '글쎄'로.

 불특정 다수의 아이들을 상대하다 보면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교실은 작은 사회이기 때문이다. 누구와도 갈등 없이 잘 지내는 소위 '유니콘'들이 있는가 하면 시도 때도 없이 다툼을 일으키는 'VIP'들도 있다. 이타적인 아이, 이기적인 아이, 눈치 보는 아이, 눈치 주는 아이, 편 가르는 아이, 제 말만 맞다고 우기는 아이, 마음이 여린 아이, 상처되는 말을 서슴지 않는 아이. 하루도 평안할 날이 없다.

 아이들의 뒤치다꺼리에 몇 년을 시달리며 내린 나의 결론은 이러했다.

 '나는 아이들을 좋아한다. 하지만 내 입맛에 맞는 아이들만 좋아했다.'

 이 부끄러운 결론을 받아들이고 가장 먼저 반성한 것이 무엇이었을지 예상해 보라. 정답은 바로 '선배 교사들에 대해 내심 얕보았던 것'이다. 수업이 구식이라고, 경력에 비해 업무 능력이 떨어진다고, 저학년만 맡는다고 그들의 능력을 마음대로 재단했던 일. 오만했던 생각이었다.

 물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매일이 위기일발인 교직을 수십 년 동안이나 견뎌오신 것. 그것이 바로 후배 교사들의 존경을 받아 마땅한 모든 이유이다. 학년이 낮을수록 본능에 가까워지는 아이들을 무던히 다루어 오신 노련함. 저경력 교사로서는 흉내도 낼 수 없는 강한 내공이 필요한 일이었다.



 학부모들은 교사의 적이 아니다. 하지만 몇몇 학부모들은 어쩌면 교사의 적이다. 상담과 민원 응대 등등. 학부모를 대하는 일은 마지막까지도 참 어렵다. 매일 자처하여 학부모와 통화하는 정성을 가진 선생님들을 보노라면 대단하단 마음이 인다. 한 마디 한 마디, 참 조심해야 한다.

 '기왕이면 좋게 넘어가자'. 학부모와의 관계에서 이 말이 정답이라 여겼다. 괜한 갈등을 만들지 말자고. 과연 잘한 일이었을는지. 돌아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학업 문제가 있어도, 생활 태도가 바람직하지 못해도, 교우 관계를 망가뜨리는 주범이라도 그저 '아이가 요즘 잘합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로 일단락해 버린. 불편한 공기를 피하려 순간순간 내렸던 쉬운 결정들이었을 뿐이.

 초임 교사나 젊은 교사가 자신보다 인생 선배인 학부모에게 강한 어조로 말하는 것은 힘들다. 어른의 말에 감히 토달지 못했던 '착한 아이'기질이 잠재의식 속 여전히 남아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맡은 아이들을 진정 위했다면 보다 솔직하게 문제점을 공유해야 했노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성적표에 좋은 말만 적으라는 상부의 지시도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아이에게서 장점도, 발전 가능성도 찾을 수 없다면 어찌해야 하는 건지. 결국 난 내가 작성할 마지막 성적표까지 거짓말로 가득 채웠다. 학생들의 객관적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는 토대를 제도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어야 한다.



 교사 집단의 태생적 문제가 있다. 전부 다 '우등생'이었다는 사실이다. 수업 수준을 학생들의 평균치로 조정하고 우등한 학생들에겐 심화 과제를, 부진한 학생들에겐 보충 과제를. 어느 교사가 모르랴.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예비 교사도 달달 외울 기본 중의 기본이다.

 자라온 환경이란 게 참으로 지배적인 것이, 돌아보면 나는 대부분의 수업에서 우등한 아이들을 '정상'이라 여겼던 것 같다. 평균쯤 되는 아이들은 '갸우뚱'정도, 부진한 학생들은 내심 '비정상'으로 치부했을는지. 부끄럽다. 학습 부진아들을 챙기며 다독였던 액션들이 과연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체육 전담 교사를 맡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행동이 느리고 운동 수행 능력이 부족한 학생들을 '수업 방해 요소'로 치부하진 않았는지. 모둠별 수업을 할 때면 느린 친구들은 모둠원의 질타를 피할 수 없다. 나 또한 말로만 참된 소리를 하며 내심 동의했던 것은 아닌지. 여태 수업하며 반성할 점을 찾으라면 수도 없다.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해 학생들에게 감정적으로 대한 것이며, 업무 능력을 맹신한 것이며, 스스로의 열정을 과대평가한 것이며. 하나하나 떠올리기 시작하면 부족했던 점이 소나기처럼 나를 때린다. 부끄럽지 않으려 애썼던 듯하지만 결국 나 역시 부끄러운 한 명의 선생이 되어 있었다.


 돌아보면 아쉬움 가득한 교직 생활들. 하지만 언제까지고 마음에 담아둘 수만은 없다. 자책은 사람을 작게 만들지만 반성은 사람을 크게 만든다. 삐뚤삐뚤한 걸음들 와중에도 분명 배운 것들이 있었을 거다. 교직 생활에 최선을 다했는가. 사실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 안일한 공무원의 합리화에 묻혀 살았으면서도 떠날 때 되니 최선 못 다했음이 아쉽다. 웃긴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내게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재능'을 주셨을지. 교직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 훗날 돌아볼 앞으로의 삶에선 후회를 남지기 않기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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