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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버트 길벗 길But Feb 13. 2017

나도 비트겐슈타인을 읽은 적이 없다

- 표지 : 비트겐슈타인의 '오리 토끼'



오스트레일리아의 '오리 너구리'는

생태계에서 일어난 작은 교란이다

왼쪽을 집중하고 있는 '오리'면서

동시에 오른쪽을 집중하고 있는 '토끼',

정신계에도 작은 교란같은

'오리 토끼'가 있다


'오리 토끼'의 등장은

오리냐, 토끼냐의 진실 규명이 아니고

이를 접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장난을 치는 농담도 아니며,

위의 그림을 어떻게 받아 들이느냐 하는

'수용의 문제'에 있다


한 개인이 속한 국가의

독서 문화 또는 감각에 따라,

사람들은 오리부터 인식했을 수도 있고

토끼부터 인식했을 수도 있으며,

교묘한 장난임을 눈치 채고

미소를 짖고 있었을 수도 있다


통치 권력은 개인에게

언제나 잔인한 모습을 보여왔던 바,

제국 국가가 자기 식민지에서의

저항하는 사람들에 대한 응징과

남녀간 불륜을 처형으로 다스리는

문화권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즉, 식민지-비식민지의 상호 입장을 바꾼 관계나

문화 환경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모호하고 '불확실'한 기준이

통치 권력의 '확실'한 법 아래

강요 또는 적용되는 순간들인 것이다


항상 '불확실한 기준을 통해서

확실함에 의해 심판 받는 구조'가

세상에서 늘 일어나고 있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리 토끼' 같은

정신계에서 일어난 작은 교란을

과연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되고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깨닫게 된다


첫째, '오리 토끼'는 가상의 동물이라서 존재 자체가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는 시각이다

둘째, '오리 토끼'는 존재 방식의 고유한 동시성을 잃고, 오리와 토끼가 가진 특성을 절반씩 나눠 갖은 특이한 동물이 되기 쉽다

셋째, 사진 속의 '오리 토끼'도 우리를 바라 본다는 사실을 잊기 쉽다는 것이다


나무와 돌, 하늘과 별 등도

그들의 시각으로 인간들을 바라본다



* 백남준 - '나는 비트겐슈타인을 읽은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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