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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율 Nov 22. 2023

엄마의 그림자

황무지 같은 사막을 걸었던 그날




엄마의 손을 잡고

모래 먼지가 폴폴 날리던 비포장 도로를 걷던 그날은

'엄마와 나의 뒷모습'으로 기억된다.

그날의 엄마 뒷모습을, 나의 뒷모습을, 우리의 뒷모습을 그 어린 날의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그날은 비포장 도로 주위로 뜨문뜨문 들어섰던 낡고 낯선 집들, 낡은 트럭,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던 모래먼지 그리고 우리 둘의 뒷모습으로 기억된다.






떼인 빚을 받으러 가던 길이었다.

아빠는 부잣집의 아들이었다 한다. 엄마와의 데이트가 끝나면 아빠는 항상 택시에 태워 보냈다고 한다. 8남매의 막내로 사랑과 유산을 듬뿍 받았지만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며 듬뿍 받던 사랑도 날아가고, 젊은 날의 추억과 함께 유산도 날아갔다고 한다. 아빠가 고등학생 시절, 당시 꽤 비쌌던 교복도 누군가 추위에 떤다고 벗어주고 올만큼 아빠는 호탕한 남자였다. 그런 호탕한 남자와 결혼한 덕에, 지역유지의 셋째 딸로 태어났던 엄마는 호강은커녕 생활력이 강한 여자가 되었다.


단칸방에 살던 우리였음에도 아빠의 통 큰 베풂은 끝나지 않았고, 우리는 언제나 알뜰하게 살았다.




어렸을 적 아빠의 컬러 카메라를 기억한다.

우리 형편에 카메라는커녕, 생활비가 급급했음에도 지금의 MBTI로 치면 극강의 F라 평가될만한 낭만주의자 아빠는 컬러 카메라를 장만하셨다. 딱히 쓸 곳이 많지 않았기에 집에서 가끔 아빠가 자랑스럽게 카메라를 꺼내 보여주셨던 걸 기억한다. 매우 고급지고 귀한 카메라였지만, 우리 집에서는 자신의 역할을 뽐내기가 쉽지 않았다.




대학생 시절 배낭여행을 준비하면서 선배와 배낭을 보러 다녔다. 고급 브랜드들은 십만 원이 훌쩍 넘는 가방들을 팔았기에, 우리는 동대문을 뒤지고 뒤져 단 이만 원짜리 가방을 찾아냈다. 살짝 부실해 보이긴 했지만, 언제 다시 여행을 갈지도 모르므로 고급은 필요 없었다. 이번 한 번의 여행에서 가방끈이 끊어지지만 않으면 되었다. 가방을 사고 선배와 아빠를 보러 가자, 아빠는 우리를 고급 소고기 식당으로 데리고 가셨다. 나의 선배를 대접하기 위함이었지만, 이만 원짜리 가방을 사고 먹던 십만 원짜리 고기는 즐겁고 행복하기보다, 억울하고 서러웠다. 그 몇만 원을 아끼려고 내가 몇 시간을 걷고 또 걸었는데. 내가 지치게 아꼈던 그 몇만 원은 이렇게 날아가고 있었다. 자식의 친구를 정성껏 대접하고 싶었던 그 마음을 엄마가 된 이제는 알지만, 그때는 나까지 비싼 고기를 먹는 그 순간이 너무도 서글펐다.



이럴 거면 그냥 나도 좋은 가방 살걸 그랬어.


그 날. 엄마는 그 한 걸음이 얼마나 두려웠을까. 엄마의 마음이 궁금하다.




가끔 그날이 생각난다.

엄마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가던 어린 내가.

분명 대한민국 어딘가였지만, 내게는 사막과도 같은 황무지를 두려움과 함께 걸었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그날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눈이 촉촉해진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빚을 받으러 가는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때 엄마의 나이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더 어리고 어렸다.

 


이젠 내가 아이에게 ‘엄마의 그림자’가 되었다.



이젠 내가 딸에게 '엄마'가 되었고, 나의 그림자는 딸에게 '엄마의 그림자'가 되었다.

나의 그림자가 딸의 인생에서 어두운 그림자가 되지 않도록

그래서 그 언젠가 마음과 눈을 촉촉하게 적시는 아련한 기억으로 남지 않도록

지금의 하루들을 성실히 살아가고자 한다. 조금 더 웃으면서.

그게 엄마로서의 내 몫일테니까.








<사진 출처: pixab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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