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하나. 서른 둘

<2011년 크리스마스 이브를 추억하며>

by 물 만난 물고기

아이패드를 선물 받았다.

내 인생 통틀어 가장 값비싼 선물이다. (태어나 지금까지 부모님께서 주신 모든 것들은 제외하자)

솔직히 얼마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비싼 건 맞다.

나에게 아이패드는 덮어놓고 ‘비싼’ 종류의 물건이니까. (실로 비싸기도 하고)

값을 검색해본다. 70만원이 조금 안 되는 가격이다. 역시 비싸군.


생일 선물이었다.

생일을 3일 앞둔 날 오전, 김포공항 7번 게이트 앞에서 아이패드를 받았다.

제주도로 가는 길. 남자친구의 커다랗고 익숙한 가방에서 신문물이 나왔다.

이렇게 좋은 선물을 받아도 되려나. 지난 초겨울 그의 생일에 나는 무엇을 주었던가 잠시 생각한다.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이만큼 좋은 선물을 준 기억은 없다.

기억을 잠시 회고해보자면, 그때도 공항이었다. 제주공항.

W컨셉 온라인 마켓에서 나는 남자친구의 생일 선물을 구매했다.

김포공항행 비행기 보딩 시간을 기다리며.

따뜻해 보이고 트렌디하면서도 댄디해보이는 카키색 베스트 재킷이었다.

남자친구를 밀렵꾼으로 만들기 십상인 옷이었지만 디자인이 예뻐서 나도 그도 만족했다.

심지어 남자친구와 함께 찾은 빈티지 상점의 직원 분이

그의 옷을 극찬하기도 했다. 내가 이런 안목을 갖고 있다.


아. 다시 돌아오자. 주제에서 많이 벗어났다. 아무튼 내가 하고싶은 말은 이게 아니다.

선물을 자랑하려는 것도 아니고, 내가 더 좋은 선물을 했니 안했니...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저 어떤 기억이 났다.

2011년 크리스마스 이브. 여자 넷.

9년 전이다. 시간이 야속하군. 아무튼 우린 어렸고...몇 살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안난다고 하면

좀 그렇지? 산수를 해보자. 32-9 = 21 (내 친구들은 나보다 한 살 더 많으니까 22살이었군)


홍은동에서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아주 많이 어렸지만, 자신의 어림을 등한시 여기느라 바빴던 게 그 때의 우리다.

그 날 우리는, 크리스마스라는 좋은 날을 빌미로 모였고

서로가 있음을 감사하며 아주 많이 먹었다 (‘소처럼 먹어제꼈고’란 표현이 맞겠다)

누군가 내 방 이불에 토를 했던 게 이 날인가.

그리곤 방문을 잠가버려서 한바탕 난리가 났던 것도 이 날이었던가.

위장의 한계를 모른채 끝까지 갔던 지난 날. 역시 우린 어렸고, 호기롭게 아주 많이 먹었다.

배가 부르고 나서 (모든 것을 게워내기 전까진) 늙어간다는 것에 대해 사뭇 진지하게 슬퍼했던 것도 같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비웃는다)


아무튼 그땐 그랬다.

그리고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넷 다 솔로였다(?)

우린 어리고 예뻤는데. 그런데 왜.

지금의 나도, 그때의 나도 이 말도 안되는 사실이 의아했던 것 같다.

그러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약속, 아니 결심에 가까운 공동 목표를 세웠겠지.


자정이 가까워져 왔겠고, 우린 취기가 올랐을 것이다.

누가 제안한 건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였나? 모르겠다)

우리는 남자친구가 없는 스스로를, 그리고 서로를 불쌍히 여겼고

그로 인해 하나의 목표를 세우게 된다.


그래, 너희도 기억하겠지. 우리의 5만원 목표말이야.

정상회담도 아닌데 우린 적정금액을 책정하는데 사뭇 진지했었지.

그 당시 우리에게 10만원은 손 사례칠 정도의 금액이었고, 7만원도 조금 자신이 없었잖아.

5만원이었다. 진지한 정상회담의 마침표를 찍었던 금액은.

태산같고도 티끌같았던 5만원. 풋사과 같았던 약속. 아무튼 5만원이었다.


우리의 공동 목표.

‘2012년에 우리, 어떤 형태로든 남자 사람에게 5만원 상당의 선물을 받아야만 해. 그러기로 해‘


귀엽다 못해 너무 소박한 금액이라 실소가 터져도 그 땐 진지했다.

2012년 안에 성공한 사람이 있다면 기별을 주도록 해. (있었긴 한거지)


그 날로부터 9년이란 시간이 지났고 우리는 9년만큼 늙었다.

안 올 것 같았던 서른을 지났고, 서른이 지나도 늘어나는 건 눈주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을만큼

우리는 많이 자랐다.

너무 자란 나머지 한 친구는 가랑비에 젖는 사랑을 하더니 급작스레 런던댁이 되었고,

또 한 친구는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을 몸소 보여주며 6월의 신부가 될 예정이다.

그 시절 그 누구보다 안정적인 삶을 살 것 같았던(?) 한 친구는 자유를 쫓아 뉴질랜드로 훌쩍

떠나버렸다. 영원히 같이 놀아줄 것처럼 굴던 것들이 다 떠났다. 너네 나쁘다. 서울팸의 붕괴다.


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나는 그냥 그 때나 지금이나 서울에 있고(집 값에 허덕이고 있고)

유부녀가 되지도 않았고 예신은 더더욱 아닌채로 그냥 늙고 있다.

그래도 남자친구가 있고 아이패드도 있다. (더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각설하고,

나는 오늘 아이패드를 받았다.

치기어렸던 9년 전의 다짐이 생각나는 밤이다.

5만원에서 14배나 올랐다고, 몇 백짜리 선물 받은 건 아니지만 그냥 그렇다고.

우리가 5만원에 집착하던 때가 있었는데, 참 많이도 컸다고, 너네한테 말하고 싶은 밤이다.


우리 추억 잊지 않았지? 우리 이런 때도 있었는데...

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참 길게도, 참 많이도 썼다.

간간히 꺼내볼 추억을 읽게끔 만들었으니, 오늘은 기쁘게 잠들기로 한다.


P.S 얘들아. 5만원짜리 선물 받자고 해놓고 나 사실 그 약속..

2년 동안 못 지켰어 (아니야 뻥이야 3년이야)


후. 얘들아, 너희도 판 돈 많이 키웠지?

9년 정산 해보자. 2020년 크리스마스 이브 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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