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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tumn Dec 31. 2021

제주생활백서

머메리즘, 한라산

제주에선 산을 오름이라고 부르는데, 매일 오르더라도 1년이 좀 더 걸릴 만큼 오름이 많다. 부르는 이름도 달라서 -봉이 붙기도 하고 -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라산만큼은 오름이라 불리지 않는데, 한라산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이름이 어떻든 그냥 낮은 산의 느낌이다.

입도 이후 매년 한라산을 올랐었다. 한라산은 사시사철 다른 옷을 입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사계절 내내 아름답지만 특히 늦은 봄 진달래가 피어나 분홍빛을 가득 머금고 있을 때와 여름의 짙은 녹음으로 푸르름 그리고 정상에 올랐을 때 뻥 뚫린 시야는 마음까지 시원하게 해 준다. 매해 짧아지는 같은 계절의 단풍은 한라산 보다는 오르는 길과 주위 계곡에서 느낄 수 있다. 겨울을 알리는 눈은 가장 먼저 한라산에 도착한다. 눈꽃이 피고 순식간에 겨울왕국으로 변하는 한라산의 빼어난 설경은 매번 봐도 새롭고 아름답다.


한라산을 오르는 방법도 다양한데, 나는 어리목으로 올라서 영실로 내려오는 코스를 제일 좋아한다. 제주에 오기 전 칠레의 토레스 델 파이네 트레킹에서 걷던 평야와 비슷해서 일까, 이 코스에서 나는 윗세오름에서 남벽분기점까지 중간에 작은 평야를 걷는 일과 하산 영실로 접어드는  길부터 계단이 시작되는 사이의 길이 참 좋다.


성판악코스는 중간에 사라오름(산정호수가 있어 물 위를 걷거나 겨울엔 얼음 위를 걷는 즐거움이 있다.)과 정상에선 백록담을 볼 수 있어 자주 올랐지만 매번 하산 시 조릿대의 지루함을 감출 수 없다. 아직까지 관음사 코스는 탐방하지 못했다. 다음을 위해 자꾸만 남겨두고 싶어 진다. 내년에는 한라산 둘레길 트레킹과 함께 도전해보고 싶다.


겨울에 눈이 와도 서귀포의 해안가에는 잘 쌓이지 않아서 그런지 체감상 제주에서 겨울 내내 눈을 볼 수 있는 곳은 한라산 뿐인 것 같다. 제주에서 나고 자랐어도 한라산을 가지 않은 사람이 많듯이, 같은 제주도에서도 계절은 같지만 지역마다 고도에 따라 날씨가 다른 모습은 6년을 넘게 살아도 참 신기하다.


제주에서 매해 새해를 맞이 할 때마다 기억나는 추억 한 가지는 한라산 등반이다. 제주에서 맞았던 첫 새해는 한라산 해돋이라는 큰 결심과 포부로 시작됐다. 2016년 1월 1일 새벽 3시부터 어둠 속에서 등반을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어두워서 속도가 더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른 시각 부터 등반을 했다. 오들오들 떨며 해를 기다렸던 한라산 정상의 새해는 바람까지 더해져 매서웠다. 마침 운이 좋았는지 그 해에는 한라산에서만 제주에서 유일하게 해돋이를 볼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기다림이 길었던 새 해였고, 구름 위에서 내민 해는 아름다웠지만 찰나의 순간이었다. 뼈가 시릴 만큼 혹독한 추위였고 그 이후 더 이상 해를 보러 한라산에 가지 않았었다. 제주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라산에서 맞는 해돋이가 된 것 같다. 이제 가고 싶어도 가기가 힘들어졌다. 지난해부터 탐방예약제가 시작되어 해돋이 예약은 매년 힘들어질 테고 더욱이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한라산 새벽 입산도 통제된다고 한다.


한라산 등반에서 꽃이었던 대피소 특식 컵라면도 몇 해 전부터 사라져 버린 추억이 되었고, 라면의 생명인 뜨거움은 항상 아쉽기만 하다. 새해 첫날 진달래대피소에서 먹었던 컵라면의 따뜻한 맛은 오래도록 기억된다. 그 날이후 나는 여전히 보온병에 뜨거운 물을 담아 한라산을 오르고 통과의례처럼 따뜻한 컵라면을 먹고 내려온다.


 한라산을 오르며 나는 등정이라는 결과보다는 등정에 이르는 과정에 의미를 두게 되었고 그 기쁨을 알았다. 그리고 제주에서 한 가지 믿음이 생겼다. 바로 자연이 주는 힘에 대한 믿음이다. 해는 매일 떠오르니까 이번 새로운 해는 집에서 맞이하기로 하고, 항상 변함없이 존재할 것 같은 한라산, 언제든 마음먹으면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금 이 시절도 추억이 돼버리기 전에 2022년에도 아무튼, 한라산에 오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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