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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제 이준서 Apr 22. 2018

아바타 Avatar

아바타 VS NPC

미래의 지구가 왠지 낯설지만은 않다. 공기가 드나드는 코와 입을 막음은 또 다른 공기의 흐름인 대화와 소통의 단절을 의미하는 듯 하다. 종이박스에 놓인 택배인형처럼 제이크 설리의 형은 그렇게 생을 마감한다. 죽음조차 신성하지 않다. 아바타의 파란 피부는 영적인 색깔이다. 여러모로 영화 '늑대와 춤을'에서 네이티브 아메리칸 -인디언은 잘못된 표현- 수우족을 떠올리게 하는 나비족은 실제로 그들의 삶을 투영한다. 수우족의 마지막 대추장 시팅불(Sitting Bull)이 미국 정부의 원주민 보호구역 정착 명령을 거절하여 한 연설의 일부이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 또 다른 이웃들인 동물들에게 아름다운 대지를 차지할 똑같은 권리를 주어야 한다...중략... 백인들은 우리에게 와서 자신들의 생각에 따라 살라고 우리를 윽박지르고 있다. 이것은 공정하지 못한 일이다. 우리는 백인들에게 우리가 사는 방식대로 살라고 강요할 생각이 꿈에도 없다. 지금 우리는 가난하지만 자유롭다. 어떤 백인도 우리의 발걸음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죽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권리에 따라 자유롭게 죽을 것이다. 우리는 당신들에게 땅을 주지 않았다. 당신들이 빼앗아 간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살 것이다."

죽음조차 신성하지 않은 미래의 지구. 종이박스에 놓인 제이크 설리의 형
라코타 대추장 시팅불

퇴역군인인 제이크 설리는 형을 대신해 아바타프로젝트에 투입된다. 자신과 같은 DNA로 만들어진 나비족의 몸으로 의식이 전이된 제이크 설리. 달마대사는 인도인으로 아주 잘생긴 미남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유체이탈로 물가에 버려진 괴생물의 시체에 들어가 그 시체를 옮기는 도중 그의 몸을 그 괴물의 혼이 탈취하여 현재 우리가 자주 접하는 못생긴 달마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동양 선도의 양신성취, 밀교의 환신성취와 유사하게 달마대사는 영적인 몸을 성취하여 자유로이 의식을 전이하는 비술을 익혔을 것이다. 그러한 의식전이를 과학으로 접목하게 되고 그렇게 제이크는 나비족의 몸과 지구인의 의식으로 나비족 공동체의 중심으로 들어서게 된다.

달마대사. 자~알 생겼다

영화 '어벤저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에서 비브라늄으로 만들어진 비전의 몸에 자비스라는 인공지능을 주입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존재를 만들어 낸다. 불교에서 깨달음의 본체인 법신(法身)불은 보신(報身)불을 통해 깨달음과 중생 구원의 능력을 갖추고 현실 세계에는 다양한 형태의 화신(化身)불이 나타나 인간세계를 교화하고 구원하는데, 대표적인 화신불로 석가모니불을 들 수 있다. 힌두 전통에 따르면 최고신, 즉 궁극적 실재로서의 비슈누는 이미 9번을 인간으로 화신하여 인류를 악으로부터 구하고 정의를 회복하는 일을 했으며, 마지막 10번째 화신인 칼키 아바타가 다시 인류를 구원하고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올 것이라고 본다. 원래 아바타는 산스크리트 '아바따라(avataara)'에서 유래한 말로 아바따라는 '내려오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바뜨르(ava-tr)'의 명사형으로, 신이 지상에 강림함 또는 지상에 강림한 신의 화신을 뜻한다. 영화에서 힌두교의 영향을 실제로 느낀 건 나비어로 파괴를 skina로 표현하고 있다. 힌두교에서 파괴의 신은 shiva이다. 어벤저스의 비전은 비브라늄 몸과 토니 스타크가 만들어낸 자비스라는 인공지능이 빚어낸 토니 스타크의 아바타를 넘어 스스로 존재하는 자임을 밝힌다. 온라인게임에서 단지 게임의 진행을 돕는 NPC(Non-Player Character)가 아닌 PC(Player Character)로서의 존재라는 것이다. 의식을 지닌 아바타로서의 존재와 의식없는 NPC는 마땅히 구별되어야 한다. 의식없이 돈을 벌고 있지 않은가? 아빠라는, 엄마라는 역할놀이에 빠져 나를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당신은 NPC인가 신의 아바타인가?

주어진 역할놀이에 빠진 NPC

아바타프로젝트의 총책임자 어거스틴 박사는 판도라행성 자체가 수많은 나무들이 신경세포처럼 얽히고 섥혀서 전기적신호로 네트워크를 형성한 하나의 거대한 의식생명체임을 판도라행성의 총책임자에게 피력한다. 그러나 언옵타늄이란 돈이 되는 광물에만 신경쓰는 사업가가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리 만무하다. 실제로 영화에서 그 전기신호는 실제 사람의 뇌신경과 비슷하며 또한 우주의 모습과도 유사하다. 인간의식의 바다와 우주라는 바다가 다르지 않음을 온몸으로 말하는 듯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드라망은 제석천의 하늘을 덮고 있는 무한히 큰 그물을 말하는데, 그 그물의 씨줄과 날줄이 만나는 그물코마다 맑고 투명한 수정구슬이 놓여 있는데 그 맑고 투명한 수정구슬들은 서로의 빛을 받아 다시 서로를 되비춘다고 한다. 그래서 한개의 수정구슬 안을 들여다 보면, 그 그물에 있는 모든 수정구슬들이 서로 투영되어 하나가 전체를 담고 있고, 전체가 마치 하나와 같다고 한다. 프랙탈 원리, 형태발생장이론에 의해 세포의 발생에서부터 우주의 생성까지 설명할 수 있는데, 개인의식으로 따지면 한 개인의 의식이 그 공동체에도 반영되는 바, 단 일정 임계치에 이르렀을 때 개인의 의식이 전체의 의식이 되는 프랙탈현상이 반영되는 것이다. 인드라망, 연기법 등의 고대지식과 현대적 물리학의 접목이 통섭됨은 시대적인 조류인 것이다. 이러한 여러 실제적인 작용에 의해 '나 하나쯤은'이라는 생각은 어느 시대에나 통용되는 무책임한 발상이나 특히 요즘처럼 개인의 영향력인 커진 지금이 더 신경써야할 부분인 것이다. 에너지보존질량에 의해 생각이라는 무형이나 강력한 에너지와 그 생각을 반영한 말이라는 에너지는 보이지는 않으나 에너지의 형태로서 실상계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삼가해야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열역학 제 1법칙에 의거, 우주 안의 모든 에너지는 불변이나 그 형태는 바뀌어질 수 있다. 부정적인 비물질에너지가 물질에너지의 형태로 오늘날 나의 삶을 피곤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인간, 판도라행성, 우주는 놀랍도록 닮아있다
불교의 인드라망. 얽히고 섥힌 우주와 닮아있다
프랙탈. 부분은 전체를 반영한다

나비족에겐 에이와라는 신이 있다. 우리의 마고신앙이나 서양의 가이아를 떠올리는 에이와는 커다란 신성한 나무를 통해 그 뜻을 전하는데 서양의 생명나무, 우리의 신단수를 떠올리게 한다. 세계의 축이자 중심인 우주수(宇宙樹)는 다른 차원의 세계로 가는 통로이자 신들과의 교류를 가능케 하는 장소다. 그리스인들 델포이 아폴로신전에 있는 원뿔형의 돌을 옴파로스(omphalos)라 하여 세계의 중심으로 여겼다. 민속신앙에도 서낭당 나무가 나오는데, 오래된 나목에는 목신이 존재한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고목을 함부로 베어서는 안되고, 실제로 함부로 베어내면 해를 입기도 한다. 목신(木神)이라는 개념을 천녀유혼에 나오는 나무귀신이 아닌 기운이나 정령 정도로 이해하면 될듯 싶다.

클림트의 ‘생명나무’, The Tree of Life - Gustav Klimt, 1909 (그림 출처: http://www.artinthepicture.com/)
신성한 에이와의 뜻을 전하는 영혼의 나무

영화 '촉산'에 나오는 산들처럼, 날아다는 '할렐루야산'이 나오는데 플럭스 볼텍스(flux vortex)에 의한 자연현상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미국의 세도나 산, 히말라야, 한국의 계룡산이 볼텍스가 강하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그러한 산을 찾아가 그 기운을 경험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신성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 또한 그 기운에 고무되는 바, 신성한 영혼의 나무와 할렐루야 산과 함께하는 나비족의 삶이 신성함은 태생적인 것이다. 회색빛의 도시가 인간의 삶을 단순히 도식화하는 것과 달리 총천연색의 자연은 인간의 몸을 정신을 근원으로 되돌린다. 그래서 입는 옷도 다양한 색깔의 옷들로 기운 전환을 해야 하고, 모든 색을 포함하고 있는 흰옷이 가장 무난한 이유이다. 다양한 개성이 요구된다.

네이트리가 말하는 에너지는 이런 것이다. 에너지는 서로 연결되어 있고, 우리가 지금 잠시 빌려 쓰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이러한 소유가 아닌 공유의 개념을 아누타 섬사람들의 공동체 의식 '아로파'에 의거, 자본주주의 대안으로 피력한 글이 있다. 여기에 더하여 에너지는 선물로서 주어진 순환하는 물질이다. 에너지를 순환하지 못하고 언옵타늄이란 물질을 얻기 위해 나비족을 내쫓으려는 지구인들이 그들보다 더 진화한 종족인가?

에너지는 살아있을 때 잠시 빌려쓰는 것이다

마침내 나비족의 집, 홈트리를 쓰러뜨리는 용병대장 쿼리치. 쿼리치는 우뇌 무식자이다. 감성이 없고 모든 이들을 노예로 보는 전형적인 좌뇌형 인간이며 바로 지금의 인류의 모습이다. 미투 운동과 같은 현상이 바로 이러한 사회현상에 대한 반동이며,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에선 어거스틴 박사가 우뇌의 역할이고, 명령만을 따르는 군인이었던 제이크가 점점 나비족에 동화되어 드디어 우뇌를 쓸 수 있게 되자 몸만이 아닌 진짜 나비족이 된 것이다. 본능에 의존해 사냥을 하는 것은 말 그대로 본능이며, 어떻게 사냥을 할 것인가는 좌뇌이며, 죽은 사냥감의 귀에 '너로 인해 내가 오늘을 사는구나' 읊조리는 것은 우뇌로서, 네이티브 아메리칸의 전통사냥법이기도 하다. 파충류 뇌(뇌간)로 살 것인가, 포유류(변연계) 뇌로 살 것인가, 인간의 뇌(신피질)로 살 것인가? 셋이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쓰러지는 홈 트리
좌뇌로 의식이 점철된 쿼리치

어거스틴 박사가 부상을 입고, 영혼의 나무 앞에서 에이와 신에 의해 의식이 전이되는 의식을 치르는데, 강렬한 빛의 통로를 지나게 된다. 이러한 빛의 통로는 임사체험자에게 많이 언급되는 내용이다. 마치 공간이 왜곡되는 웜홀이 연상되는데, 실상 다르지 않은 현상일 것이다. 사람의 얼굴이 얼이 드나드는 굴, 영혼의 웜홀인 것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인간과 나비족의 대결. 토르크 막토가 되어 인간들과 대립하는 제이크 설리. 인간의 무지막지한 살상 무기는 영혼의 나무를 파괴하는 데에 집중된다. 여기서도 미셀 로드리게즈는 죽는다. 이 여자는 왜 이리 영화에서 자주 죽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제이크 설리는 의식 전이를 통해 진짜 나비족이 된다.

미셀 로드리게즈, 영화에서 너무 자주 죽는다

I see you. 제이크 설리와 네이트리가 나비족과 지구인의 모습으로 서로에게 하는 말, I see you. 여기서는 나는 너를 눈을 통해 본다가 아닌 마음의 눈으로 너의 내면을 본다의 의미이다. 맛을 보다, 느껴보다처럼 보다의 의미는 단순히 눈으로 보다가 아닌 공감각적으로 의미가 확대되어야 하는 바, 현재의 인류는 인지라는 감각의 환상에 묻혀 초감각적인 세계를 놓치고 있다. 네이트리의 어머니는 신녀로서 이미 도식화되어버린 과학자 아바타들은 이미 차 있어서 가르칠 수 없었다며 군인인, 머릿속에 명령으로만 차있는 제이크를 오히려 받아들인다. 불교의 공, 힌두교의 마야는 이 세상을 허상으로 보는 바, 만물이 이미 비어있다는 사실을 인지했을 때만이 오히려 채워 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항상 극과 극이 만나면 공통분모가 생기는 바, 완벽한 파괴만이 완벽한 창조이며, 완벽한 비움만이 완벽한 채움인 것이다. 배가 텅 비어야 완벽한 폭식의 기쁨을 누릴 것이 아닌가? 빅뱅이론이 이와 다르지 않음이다. 아이 씨 유. 너의 내면이 꽉 차있지 않고 비어있을 때만이 진실된 사랑을 심어 넣을 수 있는 것이다. 인도의 영적 교사 크리슈나 무르티는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이야기하였다. 아직 이크란을 타는 비행술을 익히지 않은 제이크가 하늘을 나는 네이트리를 보는 장명에서 자연스레 자유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명령을 받던 입장에서 이제는 스스로 가슴에게 명령을 내리는 진정한 아나키스트의 모습을 마음의 눈을 통해 내다봤을 것이고, 그렇게 될 때만이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가 진정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I believe I can f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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