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태 Sep 07. 2018

가르다의 안식과 스텔비오의 공포

2.24. 가르다호수-스텔비오패스

아침식사를 마치고 가르다 호수를 높은 곳에서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는 몬테발도로 가기 위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케이블카 출발 역을 찾아갔다. 하지만 아침 9시였는데도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엄청나게 긴 줄을 보고는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다음 목적지인 스텔비오 패스를 향하기로 했다. 


가르다 호수가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가르다 호숫가로 나 있는 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호숫가로 펼쳐진 호수의 멋진 경치를 보다 보니 도저히 그냥 올라갈 수 없어서 길가에 차를 세우고 물속에 잠시 들어가보기로 했다. 차 안에서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호숫가에 자리를 편 후 물에 들어가보니 바닷물과는 달리 끈적이는 느낌 없이 맑은 풀장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상쾌한 느낌이다. 


물빛이 환상적인 가르다 호수


한참을 헤엄치고 있는데 백조 한 마리가 옆을 지나간다. 이곳 사람들은 백조가 바로 앞에 있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지만 난 너무 신기해서 백조를 향해서 헤엄쳐 갔다. 사람들 사이를 헤집으며 헤엄쳐 다니던 백조가 내가 다가가니까 뭔가 위협을 느꼈는지 슬금슬금 도망간다. 이때 아니면 백조와 같이 헤엄쳐 기회가 언제 또 있을까 싶어서 열심히 쫓아갔지만 백조의 수영실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호숫가에는 많지는 않았지만 드문드문 사람들이 누워서 햇볕을 즐기고 있었는데 그 중에는 가슴을 드러내고 누워 있는 여자도 있다. 크로아티아에 있던 누드족들은 남들 잘 안 보이는 곳에 구석구석에 박혀 있었는데 여기서는 누가 보던 말던 별 신경 안 쓰고 누워 있다.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는 풍경이라 실제로 보면 어떨까 했는데 너무 자연스러워서 별다른 느낌은 안 들었다. 그래도 속으로는, ‘그래, 이런 풍경 정도는 있어 줘야지..’ 라고 생각하며 다음 목적지인 스텔비오 패스를 향해 북쪽으로 올라갔다. 




백조와 함께한 수영


스텔비오 패스는 이태리와 스위스 국경 근처에 있는 고갯길인데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길 순위에서 두 번째로 꼽힌 적이 있을 정도로 험한 길이다. 산의 한 면을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길인데 각 나라마다 험한 산에는 이런 형태의 위험한 고갯길이 하나씩은 있는 것 같다. 스위스의 그림젤/푸르카 패스, 이태리에 스텔비오 패스, 노르웨이의 트롤스티겐 등이 대표적이다.


굳이 위험한 고갯길을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지만 자동차 여행 아니면 올 수 없는 곳이라 일부러 찾아가보기로 한 것이다. 


가르다 호숫가의 집들


스텔비오 패스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보르미오라는 마을을 먼저 찾아가야 하는데 보르미오로 가는 길을 검색하니 구글맵이 세 곳의 루트 중에 좀 돌아가는 길을 추천한다. 가로질러 가는 짧은 길이 있는데 굳이 돌아가는 길을 추천하는 게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해서 그냥 우리는 가장 짧은 길로 질러서 가기로 했다.


 구글맵이 틀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뭔가 오류가 있겠지 라고 생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우리가 선택한 그 길은 알고 보니 구글맵도 포기한 악몽의 산길이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산길로 접어드니 길이 점점 좁아지더니 나중엔 차 한대도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길로 변했다. 워낙 좁은 길이어서 맞은 편에서 차라도 오면 서로 지나칠 수 있는 구간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후진하거나 해야 했다. 부디 반대편에서 제발 차가 오지 않기를 속으로 빌면서 올라갔다. 


그나마 덜 힘들었던 스텔비오 패스


도로 관리가 제대로 안 되는지 노면 상태가 매우 안 좋아서 곳곳이 갈라지고 거의 자갈길이나 마찬가지의 험한 상태인 곳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가파른 절벽을 따라 길이 나 있는데 가드레일 같은 안전장치도 없어서 운전하다 바로 옆을 내려다보면 까마득한 절벽 아래가 보일 정도였다. 


잘못하면 현기증으로 나도 모르게 핸들을 절벽 쪽으로 돌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운전대를 꽉 붙잡고 되도록 앞만 보고 운전해야 했다. 처음에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스릴을 즐기던 와이프도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에 점점 말수가 적어지더니 급기야는 앞을 못보고 눈을 감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모양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기름이 다 떨어져가서 잘못하면 공포의 산길 한 가운데 오도가도 못할 신세가 될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출발할 때 기름을 넣을까 생각했지만 여러 번 넣기 귀찮기도 하고 꽤 많이 남아있다고 판단해서 그냥 출발한 거였는데 그 때 이후로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인적이 드문 산길을 가다 보니 주유소가 있을 턱이 없었고, 가파른 경사길을 쉬지 않고 올라가니 연료 게이지가 빛의 속도로 바닥을 향해 가는 것이 보였다. 


그런 와중에도 고갯길을 넘어가려는 정신 나간 캠핑카들 때문에 빨리 올라갈 수도 없었는데, 캠핑카는 폭이 넓어서 안 그래도 좁은 길에서 운전하기가 힘들뿐더러 상대적으로 엔진 힘이 약해서 급경사의 고갯길을 거북이처럼 느린 속도로 기어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스텔비오 패스 정상에서 한숨돌리며


겨우 꼭대기에 도착하니 그제서야 긴장감이 좀 풀린다. 내려가는 길은 경사도 덜하고 절벽길이 아니라서 공포스럽지 않은데다가 기어를 거의 중립에 놓고 내려갈 수 있었다. 위험한 것은 알지만 언제 차가 멈출지 몰라 어쩔 수 없이 그렇게라도 기름을 아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보르미오에 도착하니 긴장 때문인지 엄청난 피로가 몰려왔다. 아직 스텔비오 패스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완전히 에너지를 소진한 모양이다. 이런 고개를 다시 넘어 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스텔비오 패스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다음 목적지인 돌로미티 쪽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다시 한번 스텔비오 패스를 지나야 했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와이프는 긴장이 풀렸는지 잠이 들었고 나는 비장한 마음으로 다시 스텔비오 패스를 향해 갔다. 12척의 배로 일본의 대 함대와 맞서기 위해 명량 해전에 나선 이순신 장군의 마음이 이랬을까? 그런데 무거운 마음으로 스텔비오 패스에 도착하니 스텔비오 패스는 앞서서 넘은 고갯길에 비하면 너무나 편안한 도로였다. 


거기도 수많은 헤어핀이 있기는 했지만 도로 상태도 좋고 무엇보다 최소한 차 두 대가 지나칠 수 있을 정도의 넓이는 되었기 때문에 올라가는 데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다. 꼭대기까지 올라간 후 나는 와이프에게,


“스텔비오 패스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위험한 길이면 우리가 아까 지나온 길이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길인가 봐.”


라고 얘기한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돌로미티 초입에 있는 볼차노까지 가야 했지만 두 번의 고갯길에서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나머지 도저히 거기까지 갈 수 없어서 구글맵에서 가까운 B&B를 검색해 자고 가기로 했다. 


마리안 하우스와 주인 아주머니


몇 번의 시도 끝에 주 도로에서 조금 벗어난 한적한 마을에 마리안 하우스라는 B&B찾아서 묵기로 했다. 특이한 것은 주인 아주머니가 독일어를 쓰고 영어는 거의 못해서 숙박하고 있는 손님 하나가 통역으로 나서야 했다는 것인데 이태리 땅에서 독일어를 쓰는 아주머니와 영어로 통역해서 얘기하려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통역으로 나선 아주머니의 영어도 거의 알아듣기 힘든 수준이어서 그 아주머니의 말을 통역해 줄 다른 통역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말은 잘 안 통했지만 주인 아주머니나 통역 아주머니나 친절하게 대해주려는 마음 전해지는 것은 느낄 수 있었다. 마리안 아주머니의 B&B는 시골이어서 그런지 마치 가정집에서 대접받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시 만난 베니스의 사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