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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Sep 22. 2018

예술은 저항이다

2018년 3월 8일

일찍이 들뢰즈는 예술이란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저항이라고 말한 바 있다. 여기서 커뮤니케이션은 텍스트를 고정시키는 의미화 과정 전체이다. 그럼 들뢰즈가 말하는 예술에 있어서 저항이란 무엇일까? 맑스적 이념의 문학적 실천을 말하는 것인가?


내가 생각하기로 들뢰즈가 말하는 "예술에 있어서의 저항"은 의미화의 포획을 거부하고 미끄러지는 힘 그 자체이다. 예술적 언어의 미묘함은 어떤 본질로 환원하려는 지성적 사유의 의미화에 결핍과 잉여의 형태로 빈 공간을 남겨놓는 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텍스트는 어떤 이미지를 창조하고 무엇인가를 표현한다. 이때 우리는 지각을 통해 텍스트의 표현 혹은 이미지에 감응한다. 하지만 그것은 언어로 해석되지 않는 미지의 감각-정서의 복합체이다.


그럼 우리는 의미화로 부터 미끄러지는 불가해의 텍스트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바로 우리 사유 역량을 이해의 영역에서 창조의 영역으로 이행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통해 지성적 의미화 과정에서 벗어난 "비자발적 기억"의 출현에 주목한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분석하며, 내 의식을 경유하는 "의식적 기억"을 벗어나,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과거의 순수 기억이 솟아나는 경험을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생성되는 과정으로 설명한다.


과거의 기억, 즉 과거-시간을 현재 순간에 동시적으로 마주하고 내적 전환을 통해 미래를 열어가는 시간의 존재론을 프루스트의 소설이라는 장소에서 펼쳐놓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는 기성의 지성적 세계가 구축한 의미화에서 벗어난 새로운 의미론을 프루스트가 어떠한 철학자보다 상세하게 펼쳐보이고 있다고 본다. 이것은 철학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언제나 철학은 기성의 관념으로 세계를 해석하는데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오로지 예술만이 이 가능성을 창조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들뢰즈가 지속적으로 자신의 철학을 예술 작품을 경유하여 설명하는 이유이다. 자크 랑시에르는 들뢰즈가 예술을 자신의 철학을 설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며 비판하지만, 들뢰즈의 철학 그 자체가 칸트 미학을 비판적으로 재해석하여 계승한 결과라는 점과 예술을 통해 사유의 역량을 길러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예술의 도구화를 뜻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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