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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우일 Feb 24. 2016

너의 눈동자에 고인 나를 보다

-박배일 감독론



 

  1. ‘그’에서 ‘너’로      


   박배일의 영화 세계를 이해하는 키워드는 투쟁도 정치도 아닌 사랑일 것이라 확신한다.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상실감 그리고 소외되어 가는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일상의 무관심에 감춰진 배제의 논리에 시선을 던진다. 그의 시선에 포착된 것들은 항상 곁에 있지만 둔감했던 타자들이다. 밤이면 오물을 치우는 환경미화원, 몸이 불편한 지체장애인, 최근에는 밀양의 송전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들까지 그는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대변하다.  

  그는 부서진 그림조각의 퍼즐을 맞추듯 감춰진 현실세계의 일부분을 수집한다. 이때 서로 다른 현실과 대상을 다룸에도 감출 수 없는 하나의 동일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을 나는 ‘사랑’이라 부르고자 한다. 인간인 우리의 눈에 현실은 부서진 파편으로 존재하지만 그 조각의 합은 모자이크처럼 함께 공존한다. 어쩌면 그의 영화들은 수많은 타자들이 ‘그’가 아니라 ‘너’임을 기어코 알리기 위한 안간힘인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박배일 감독은 ‘너’와 ‘나’ 사이의 동일성을 찾아가는 사랑의 논리를 옹호한다.  


  평소 우리는 텔레비전으로 방영되는 드라마와 영화를 보며 타자의 이야기에 심취한다. 타자의 세계가 지니고 있는 아름다움과 모험으로 가득한 세계 속에서 펼쳐지는 스펙터클은 우리의 마음에 동경을 가져온다. 특히 조명이 꺼진 영화관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며 혼자만의 환상에 젖다보면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추가되어야 할 것은 스크린으로 보던 타자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묘하게 닮았지만 어긋나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사는 현실은 영화보다 아름답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누추하지만도 않다. 왜냐하면 언제나 세계는 영화보다 넓기 때문이다.   

  박배일 감독의 영화를 보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 불온하다. 이 불온함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예컨대 그의 작품들은 고어영화(gore movie)나 슬래셔영화(Slasher Movie)처럼 괴기스럽거나 혹은 충격적인 공포의 이미지들을 생산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일상의 현실을 ‘질료’로 삼아서 작업한다. 현실이란 질료를 카메라에 담아 편집함으로써 타자가 살아가는 세계의 ‘형상’을 빚는다. 우리의 일상과 가깝지만 무관심했던 세계가 수면으로 솟아오른다. 그의 작품이 불온한 것은 현실의 질료적 성격 그 자체의 자질에서 생성된다. 그 질료가 나와 분리된 객체가 아니라는 질감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이다. 

  타자는 우리 주변에 보이지 않지만 갑작스럽게 실재의 흔적을 남기며 출현했다가 사라진다. 마치 신의 흔적이 인간의 형상으로 역사 속에 출현했다가 영원히 기원의 이미지를 남기며 사라지듯이 말이다. 타자를 세계 속에서 유령으로 남게 하는 쉬운 방법은 그들의 목소리를 음소거하는 일이다. 우리는 어느 순간 들리지 않는 타자의 목소리, 즉 침묵의 경험을 일상화하며 그들의 존재를 망각한다. 나와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가 사라진 곳에 정치란 존재할 수 없다. 이러한 장소는 신이 세계의 중심이 된 사회이거나 혹은 나의 독백만이 세계를 가득 채우는 소외의 공간일 것이다. 우리에게 타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듣지 않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과 함께 주체에 대한 반성이 되돌아온다.         

 


  2. 내용 없는 기표의 내용       

  

   박배일 감독의 단편영화 「Byon Hwa」 (2011)는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으로 인해 훼손되어가는  낙동강을 소재로 삼는다. 이 작품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정부의 4대강 사업을 비판하며 ‘낙동강을 살려야한다.’는 구호로 끝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낙동강’을 매개로 감독 자신과 지인들이 공유하고 있던 기억의 소멸에 주목한다. 낙동강에 얽힌 박배일 감독 자신과 지인들의 기억이 이야기로 발화될 때마다 낙동강은 사물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대지’로 의미 전환된다. 이 작품의 미덕은 우리와 낙동강이 맺고 있던 관계를 회고의 형식으로 반추함으로써 다시 회복시키고자 한다는 점이다. 낙동강과 ‘나’ 사이의 관계가 상실되어갈수록 역설적으로 이명박 정부의 4대강 사업의 폐해가 공동체의 문제로 부각된다. 박배일 감독과 지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기억’은 ‘너’가 마주한 사건이 결코 ‘나’와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환기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연작인 「강정인터뷰프로젝트」 (2012)라는 단편영화들에서도 동일한 형식이 취해진다. 제주도 서귀포 강정마을에 해군기지가 건설되기로 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밀착 취재하기 보다는 그 내부 마을 사람들의 정서적 변화에 주목한다. 횡설수설하는 다큐멘터리 감독 지망생, 전통혼례를 준비 중인 신랑, 마을에 살고 있는 평범한 고등학생까지 그들은 특별하지 않은 주변의 이웃들이다. 그들이 강정에 대한 애정과 자신들의 꿈 그리고 현실의 부당함에 대해 눈물짓거나 혹은 논리적이지 않은 말을 어눌하게 흘릴 때 그들의 몸짓과 언어는 일종의 제로 기표(zero-signifier)를 생산해낸다.

  역설적으로 ‘내용’ 없는 기표가 담고 있는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현실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주어진 정보의 주관적 선택을 통해서 생성된다. 강정마을을 둘러싼 언론과 신문의 보도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은 「강정인터뷰프로젝트」를 통해 반성적 대상으로 바뀌게 된다. 이때 현실은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현실로 재구성된 것임을 환기된다.  

  박배일 감독이 「강정인터뷰프로젝트」를 통해 담아내는 영상은 단순히 절취된 현실의 배치가 아니다. 카메라가 포착하고자 하는 것은 인터뷰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것의 외부에 있는 잉여의 영역들이다. 그러니까 마을 사람들의 얼굴 표정과 몸짓 그리고 감정이 뒤섞이거나 혹은 뒤틀려 발화되는 목소리 또는 일상적이지 않는 방식의 어법 등등 이것들이 모여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강정마을에 대해 관객이 알고 있는 앎을 해체하는 효과를 생산한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의 4대강사업이나 해군기지건설을 둘러싼 강정마을에 대한 보도나 정보는 어디까지나 편집을 통해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박배일 감독이 자신의 지인들과 공유하고 있던 기억을 털어놓고, 강정마을 사람들의 몸짓과 정서를 관찰하는 것은 현실의 제도화된 상징 질서의 의미를 반성적으로 의심하도록 하는 기표의 생산 과정으로 읽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누군가 박배일 감독의 영화가 정치적이라고 한다면, 그 정치성은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아니라 대상을 관찰하는 카메라의 형식 그 자체에서 찾아져야 한다. 

  그가 카메라를 통해 포착하는 이미지들은 주로 사건의 중심을 들춰내기보다는 그것과 관계하는 주변부를 배회함으로써 획득된다. 이것은 도자기를 빗는 과정과 유사하다. 중심을 비워둠으로써 도자기는 본래의 형상을 유지할 수 있으며 그릇으로 기능할 수 있다. 즉 도자기는 빈 구멍이 존재함으로써 실재한다. 바로 박배일 감독의 카메라는 중심의 주변을 배회함으로써 낙동강을 둘러싼 4대강 사업의 실체에 대한 질문한다. 

  사건은 객관적인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건은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현실이 균질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비로소 중심 사건이자 우리 사회의 의제가 된다. 그러므로 박배일 감독의 「Byon Hwa」와 「강정인터뷰프로젝트」와 같은 작품들이 생산한 제로 기표 다시 말해 텅 빈 기표의 효과는 무의미하지 않다. 그것은 상징적 현실의 모든 의미화의 균질성에 반성성(reflexivity)을 부가하는 차이화의 효과이다.       


  

  3. 일상 속에 숨겨진 시선       

 

   박배일 감독의 작품 「제제에게 가는 길」 (2008)과 『나비와 바다』 (2011)는 뇌병변 장애를 앓고 있는 두 남녀의 사랑을 다룬 작품이다. 영화의 주인공은 재년(애칭 제제)과 우영(애칭 노인네)이다. 「제제에게 가는 길」은 재년과 우영이 지하철역 근처에서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처음 이들의 만남은 다른 연인들과 다름없어 보인다. 서로를 반가워하며 스스럼없이 주고받는 애정 어린 대화와 우영의 카메라 앞에서 쑥스러워 하는 재년의 모습은 일상의 연인들과 모습이 다르지 않다. 그리고 재년과 우영의 데이트가 시작된다. 

  여느 연인들이 그렇듯 둘은 함께 평범한 거리를 걷는다. 신나고 즐거워야 할 둘의 데이트가 시작되는 것일까? 곧 우리는 난관에 부딪히는 두 연인의 모습을 마주한다. 간단한 이유로 문제가 생긴다. 전동기 휠체어에 의지하는 우영으로서는 도로 포장이 되지 않은 길은 이동할 수 없기에 인근 공원의 약속 장소까지 둘은 따로 떨어져 이동한다. 보통의 평범한 데이트도 그들에게는 애써 돌아가야 하는 난관임을 우리는 목격한다. 데이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 버스정류장 앞까지 재년을 바래다주는 우영의 마음은 무겁다. 언제나 버스정류장 앞에서 재년을 혼자 보내야 하는 우영은 그녀의 집 앞까지 바래다주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속내가 편하지 않다. 이때 영화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누군가의 일상이 어느 누군가에는 특별함이 되기도 한다고. 일상의 현실은 그렇게 나와 다른 타자에게 무심하게 존재한다. 

  「제제에게 가는 길」은 사랑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장애인들의 ‘이동권’에 관한 사회적 고민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교통약자에 대한 배려 없는 일상은 두 평범한 남녀의 사랑을 특별한(?)것으로 만든다. 어떻게 보면 재치 있는 접근이기도 하다. 그들의 사랑이 일상의 무게를 견뎌나갈수록 일상이 평범하지 않다는 사실이 폭로된다. 이때 재년과 우영의 사랑은 우리의 주관성이 만들어낸 일상적 상징 질서에 구멍을 뚫는다. 그 틈에 비로소 실재가 침입한다. 우리가 일상이라 명명하는 현실에 숨어있는 시선의 권위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 작품의 질문은 관객의 내면을 향해 되돌아간다. 타자를 향한 권위적 시선은 두 연인의 데이트를 통해 다시 우리에게 되돌려진다. 영화가 제기한 물음에 대답해야 할 책임은 바로 우리이다.  

  「제제에게 가는 길」의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나비와 바다』는 재년과 우영의 결혼을 소재로 삼는다. 우영과 재년이 사귄지도 팔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우영은 재년과의 결혼을 꿈꾼다. 우영은 연일 재년에게 결혼하자고 프로포즈를 하지만 예상과 달리 재년은 확답을 피하기만 한다. 소위 연애 기간이 길면 서로에 대한 마음이 시들해진다는 권태기라도 온 것일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재년이 딱히 우영을 싫어하는 것 같지 않다. 우영은 그런 재년의 태도가 답답하기만 한다. 반면 재년은 우영의 프로포즈가 거듭될수록 부담스럽다. 시부모를 모시고 한 가정의 아내로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공포가 밀어닥쳤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우영의 프로포즈가 그의 사랑을 증명해준다고 생각했으나 우려 섞인 주변의 시선에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 아닐까 걱정이 앞선다. 그럴수록 우영과 재년은 서로 어긋나기만 한다. 

  작품의 타이틀이 『나비와 바다』인 것은 감독의 의도로 보인다. 직관적으로 시인 김기림의 「나비와 바다」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우영과 재년을 한 쌍의 ‘나비’에 비유한다면 주변의 우려 섞인 시선은 고난을 상징하는 ‘바다’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우영과 재년의 수심(水深)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시인 김기림은 수심을 모르는 나비의 날개 짓이 지닌 무모함을 애처롭게 바라보았지만 바다를 향한 그 날개 짓이 세상을 움직이는 바람의 근원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수심은 우영과 재년의 사랑에서 발생되기 보다는 두 사람 사이의 사랑이 혹시나 서로에게 폐가 되지 않을까 하는 주변의 시선에서 비롯한다. 수심은 우영과 재년의 것이 아니라 바로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의 편견이다. 우영과 재년의 사랑이 서로에게 폐가 되지는 않을까하는 주변의 우려, 이것은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로 위장한 불편한 우리의 편견어린 속내를 보여준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서로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사회가 가능할까? 굳이 사회로 확장하지 않고 가족 관계로 축소해보아도 나 자신의 유년은 이미 부모의 삶에 폐를 끼침으로써 지속되어온 것이 아닌가. 

  우리는 언제고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 놓이고 그 내부에서 다른 사람을 의지하고 살아간다. 애초에 우리의 사회적 삶이란 폐 끼치기의 연속이다. 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환상이다. 우영과 재년의 결혼이 서로에게 폐가 될 수 있다고 우려하는 것은, 나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의 망각에서 비롯한다. 이 작품에서 우영과 재년의 사랑이 겪는 장애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스스로가 만든 수심에 갇혀 바다를 향해 날아가지 못하는 나비의 운명을 자초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김기림의 시가 말하는 수심의 깊이에 좌절하기보다는 바다를 향해 날아가는 나비의 무모함을 사랑해야 한다. 그것은 무의미한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향한 잠재적 가능성이다.       


  

  4. 구석진 그늘의 고통       


  시인 아르튀르 랭보는 「지옥(地獄)의 밤」이란 시에 “내가 지옥에 있다고 믿으니, 지옥에 있게 된다. 이게 교리문답의 실천이다. 나는 내 세례의 노예이다.”라고 적었다. 랭보에게 지옥은 다른 어떤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믿는 순간 생겨나는 지금 이곳에 뿌리내린다. 현세의 지옥을 방랑하는 시인의 눈에는 인간 운명의 불행이 예견된다. 하지만 우리는 세계를 지옥에 비유하는 랭보의 말에 동의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다만 내가 사는 세계의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지옥으로 존재할 수 있다는 상대성만큼은 인정할 필요가 있다. 지옥은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계의 밑바닥에 존재하지 장소가 아니다. 내가 살아있는 실존적 상황의 곳곳에 산재한다. 

  박배일 감독의  「그들만의 크리스마스」 (2007)와 「잔인한 계절」 (2010)은 우리의 평범한 시간의 흐름이 다른 누군가에게 지옥과 다름없는 시간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신의 섭리에 따라 누구나 축복받아야 할 성스러운 크리스마스에 생계를 걱정하는 노부부의 사연과 더운 여름 자신의 생존을 위해 씻을 권리조차 빼앗긴 환경미화원들의 모습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정부가 선정한 용역회사에 의해 임금을 착취당하는 환경미화원들의 모습은 사회적 정의가 무엇인지 생각하도록 한다. 

  「그들만의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에도 한기를 느낄 수밖에 없는 노부부의 삶을 조명한다. 노부부는 이십 만원 남짓의 정부보조금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살아간다. 이들 부부는 동네 구멍가게를 경영하지만 적자를 면하지 못한다. 하반신이 마비된 남편을 대신해 아내는 고군분투(孤軍奮鬪)하지만 살아갈 길은 막막하고 뾰족한 수가 없다. 노부부의 아들은 병든 아내를 간호하다가 전 재산을 병원비로 사용했으나 결국 아내와 사별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택시기사로 취직하여 일하지만 아이들의 학비와 생계비를 벌기에도 급급하다. 생활은 빠듯하고 나아지지 않는다. 노부부의 가족들은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지만 가난의 그늘은 운명처럼 드리워져 있다. 

  영화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사실은 노부부 가족이 자신들의 삶의 태도에 있어서 부도덕하거나 무책임하지 않다는 점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가난을 개인의 무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치부한다. 그들이 가난한 것은 무능력하고 비도덕적이며 게으름을 피우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노부부 가족의 삶은 자본가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증명한다. 그들은 생존하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하지만 가난하다. 결국 이 작품을 보고 있자면 “왜 사회가 진보하고 발전하고 있음에도 우리 주변의 빈곤은 해결되지 않는가?”라고 되묻게 된다.

  또한 「잔인한 계절」은 환경미화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 문제를 다룬다. 우리는 누구나 일상생활 속에서 많은 쓰레기를 생산하지만 밤이 지나면 누군가에 의해 치워진다. 갑자기 마법이 일어난 것일까? 하지만 현실적으로 쓰레기가 사라지는 마법은 존재할 수 없다. 누군가는 노동해야 하고 그 쓰레기를 수거해야 한다. 바로 환경미화원들은 우리 스스로도 불쾌해하는 쓰레기를 수거하고 쾌적한 일상적 환경을 조성한다. 그러나 정작 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환경미화원들의 삶은 열악하기만 하다.  

  영화는 환경미화원들의 쓰레기 수거작업이 오염으로부터 자기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각종 병원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권리인 씻을 권리조차 박탈당하고 정당한 임금을 보장받지 못한 환경미화원들의 삶이란 잔혹하기만 하다. 더운 여름에도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긴팔과 두꺼운 조끼와 마스크를 할 수밖에 없으며, 더위가 주는 고통을 견뎌야 하는 잔인한 인고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들이 처한 삶의 아이러니는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걸어야 한다는 사실로 충분히 설명된다. 

  축제 분위기로 가득한 크리스마스와 길바닥에 버려진 전단지로 넘쳐나는 일상의 도시는 평온하기만 하다. 평온한 도시의 어딘가에 빈곤의 그늘이 덮여있고, 생명을 담보로 노동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고통이 있다. 박배일 감독이 「그들만의 크리스마스」와 「잔인한 계절」을 통해 관객들에게 보여주고자 애쓰는 것은 이러한 우리 삶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축복어린 세계의 한 구석에는 소외된 자들의 고통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5. 기억의 의지      

 

   최근 박배일 감독의 『밀양아리랑』 (2014)이 개봉하였다. 이 작품은 밀양 송전탑 건설을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밀양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마을주민들의 의견에도 불구하고 강압적으로 송전탑을 건설하려는 정부와의 투쟁기이기도 하다. 이 작품에서 가장 눈에 먼저 들어오는 대목은 국가에 의해 마을공동체가 붕괴되는 과정이다.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주민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폭력으로 대응하는 정부의 모습은 거대한 괴물과 다름이 없다. 이 강력한 힘을 가진 괴물에게 저항하는 주민들의 모습은 무기력하기만 하다. 


  그들은 순박한 시골의 평범한 가장이자 아내이고 연세가 지긋한 할머니들이다. 혹자들은 마을주민들이 더 많은 정부의 보상금을 바라고 투쟁하는 것이라 왜곡하지만 이 작품이 고발하는 밀양의 현실은 그러한 주장들과 얼마나 괴리가 있는지 보여준다. 충격적인 것은 마을주민들이 심각한 우울증을 앓거나 스스로 자살을 선택하기도 한다는 점이다. 송전탑의 건설을 저지하기 위한 마을주민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삼천 명의 경찰이 동원된다는 것 자체가 약자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는 기구로 전락한 국가의 이면을 보여준다. 

  왜 국가는 마을주민들을 억압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괴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괴물은 우리들의 욕망 속에서 탄생한다. 수도권을 중심으로 하는 소비문화는 더 많은 상품의 생산을 필요로 하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더 많은 전력의 공급을 요구한다. 송전탑은 그러므로 우리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대상이다. 끊임없는 생산과 소비의 동력을 얻기 위해 송전탑은 밀양의 마을주민들의 삶을 파괴하고 그 토대 위에 건설된다. 또한 여기에 정부 주도의 핵발전소 건설 정책이 개입한다. 전력 공급에 필요한 것보다 초과해 건설된 송전탑은 전력을 공급하는 핵발전소 건설의 근거가 되며, 핵발전소 건설을 위해 정부는 건설사에 정부의 자금을 지출한다. 이 과정을 통해 건설사들은 막대한 자본의 이익을 얻는다. 즉 밀양송전탑 건설을 둘러싼 사건에는 첫째 수도권 중심의 소비문화와 둘째 이명박 정부의 핵발전소 건설 정책이라는 문제가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 

  영화 『밀양아리랑』은 평온했던 마을이 점차 전쟁터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농사를 짓고 자연을 가꾸며 살아가는 것이 꿈이었던 마을주민들의 삶은 경제적 논리만을 내세우는 정부의 폭력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된다. 주민들은 우울증을 앓고 몇몇 주민들은 자살한다. 싸늘한 주검이 되어버린 주민들의 모습에 어떻게 그들을 위로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밀양에 지금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언론은 더 이상 관심이 없다. 우리는 밀양의 송전탑을 둘러싼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어떤 결과들을 낳았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바로 언론이 입을 닫았기에 우리의 뇌리에서 밀양송전탑 문제 또한 잊혀 진다.

  박배일 감독의 『밀양아리랑』은 이 같은 망각에 맞서 잊혀져가는 사건의 진실과 그것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들을 기록하고자 한다. 끊임없이 현장을 기록하고자 하는 의지, 달리 말하면 망각으로 부터 기억을 보존하고자 하는 감독의 결기가 느껴진다. 우리는 『밀양아리랑』을 통해 얼마 전까지 있었던 밀양 송전탑 문제에 대한 무관심을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마을주민들은 나와 관계없는 타자들이 아니다. 그들도 평범한 밀양의 주민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원하지 않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그들의 삶은 파괴된다. 『밀양아리랑』을 보는 우리도 국가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다. 언젠가 직면하게 될지 모르는 잠재된 가능성에 놓여있는 것이다.      

 


  6. 물음에 대답할 의무     

 

   다큐멘터리는 현장의 기록을 중심으로 하고 현실 그 자체를 질료로 작업한다. 그렇지만 감독에 의한 배치와 구성의 산물이라는 점은 다른 극영화와 다르지 않다. 앞서 언급했던 영화들 또한 리얼하게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박배일 감독의 주관적 체험의 산물일 것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움직이는 카메라 시선을 쫓아 관찰되는 세계의 이미지들은 일상적 현실의 균질성을 의심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미적인 효과를 생산한다. 어쩌면 박배일 감독의 영화들이 말하는 단 하나의 내용은 지금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스크린 속의 카메라의 움직임이 바로 감독 자신의 관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감독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형식이며 감각이고 주관이다. 관객은 감독의 카메라 워크에 맞춰 세계를 들여다보고 그의 시선으로 편집된 현실을 리얼하게 경험한다. 

  박배일 감독의 영화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타자에 대한 연민과 그들에 대한 말없는 응원이 담겨있다. 카메라가 감추고 대면하기 꺼려하는 대상에 포커스를 맞출 때 드디어 우리는 그들과 평등하게 눈을 맞출 수 있다.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눈을 맞추는 일이야 말로 대화의 시작이다. 그들의 눈으로 나를 통찰하고, 나의 눈으로 그들을 다시 살필 때 비로소 이해와 진정이 소통이 가능해진다. 박배일 감독의 영화가 감동적인 것은 사건에 대한 냉정한 사실의 관찰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눈높이를 맞추려는 작업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사건의 주변부에서 벌어지는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과 그들의 행동과 말투까지 카메라로 잡아내는 디테일이 영화가 구성해낸 현실의 이미지들에 신뢰를 더한다.  

  철학자 프레더릭 바이저는 헤겔의 사랑의 변증법에 관해 “사랑의 경험 속에서 주체와 객체, 자아와 타자는 서로를 통해 자신의 본성을 실현하며, 더 나아가 그들 각각은 오로지 타자를 통해서만 자기를 인식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나는 박배일 감독의 작업이 헤겔식 사랑의 변증법을 실천하고 있다고 본다. 그의 영화들은 카메라에 포착된 타자의 이미지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반성의 과정을 통해 주체의 실체전환(trans-ubstantiation)을 이루거나 요구하는 과정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박배일 감독의 작업들은 나의 일상을 불온하게 느껴지게 하고 지금까지 망각하고 있던 사건을 재인식하도록 도와준다. 즉 관객으로 하여금 세상의 불합리와 부조리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볼 기회를 마련해준다. 사건의 주변을 배회함으로써 중심에 대해 생각하도록 하거나 때로는 직설적으로 현장의 모습을 담아내어 관객에게 은폐된 사건의 진실을 충격적으로 전달하기도 한다. 이러한 박배일 감독의 작업에 대해 우리는 이제 진지하게 대답할 의무가 있다. 주어진 세계의 일상을 의심하지 않고 살거나 혹은 의심의 시선을 던지거나 그 어떤 방식이던 우리는 살아가는 자신의 세계에 대해 선택하고 책임져야만 한다.    


*이 글은 문예지 <오늘의 문예비평>(2015)겨울호에 발표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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