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심우일 Feb 25. 2016

너무도 낯익은 운명 그리고 사랑

-MBC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 (2014)

   드라마 속에서 한 여자를 너무도 사랑하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남자의 마음을 표현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드라마 또한 영화와 같이 시각과 청각을 활용하는 장르인 만큼 시청각적으로 시청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장치들의 활용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는 함께 하고자 하지만 서로를 밀어내고 있는 두 남녀의 마음을 카메라의 분할과 공간의 변화를 통해 감성을 잘 담아내었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통화하고 있지만 공간의 제약을 무시하고 같은 공간에 함께 앉아 대화하듯 표현한 편집이 인상적이다. 두 남녀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가 화면에 떠오르는 것보다 곁에서 말을 거는 배우의 표정과 몸짓이 시각적으로 전달된다. 배우의 말과 표정은 언어 이상의 것을 시청자에게 전달한다. 마음은 함께 하지만 휴대폰 뒤에 자신의 정체를 위장한 상태로 마음을 고백하는 이들의 모습이 애틋하다. 이들의 사랑은 영화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 (1990)에서 자신의 진짜 정체를 감추고 사촌 누이 록산느에게 사랑의 연정을 고백하는 시라노의 열정과 동시에 마지막 시라노의 죽음과 함께 찾아오는 그 결핍된 사랑의 허기를 닮았다.

   사랑의 얼굴은 두 남녀의 오해와 어긋남 그 사이에서 나타난다. 어긋남을 다시 맞추려는 노력과 실패는 사랑이 감추고 있는 가장 익살스런 표정이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은 이런 사랑의 익살을 자존심 강한 엘리자베스와 무뚝뚝한 디아시를 통해 보여주었다. 서로에 대한 오해와 편견 속에서 다투는 두 남녀의 사랑이 진실을 확인하여 결실을 맺는 과정은 역시 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의 구조와 유사하다.

    여자는 남자를 오해했다. 지금껏 남자가 자신의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을 이용하고 배신했다고. 그럼에도 그녀는 그를 잊지 못한다. 그동안 남자는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며 자신의 사랑을 혼잣말로 고백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결국 그녀의 부재이다. 잊으려 할수록 그녀의 부재가 커져가고 고통은 더 깊어진다. 마침내 남자가 여자의 곁을 완전히 떠나기로 결심한 순간 여자는 남자의 진심을 알게 된다. 남자의 집을 방문한 여자는 그가 남긴 카메라 속의 동영상을 발견하고, 남자는 진심을 들킨다.

    드라마의 이 장면은 한국 영화 <편지> (1997)의 한 장면과 비슷하다.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난 환유(박신양 역)가 남긴 편지(비디오 테잎)에 눈물짓는 정인(최신실 역)의 얼굴이 떠오른다. 영상 속에 남긴 환유의 편지를 받고 눈물짓던 정인(최진실 역)의 얼굴과 김미영(장나라 역)과 오버랩(overlap)된다. 때로 드라마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노출하기도 한다. 드라마의 제18회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 <노팅힐> (1999)의 마지막 명장면을 패러디했다. 기자회견장에서 줄리아 로버츠에게 자신의 사랑을 고백하는 윌리엄 태커 (휴 그랜트 역)의 역할을 김미영이 대신한다.

    물론 여기에는 최근 개봉했던 애니메이션도 있다. <겨울왕국> (2013)의 여주인공 엘사의 초능력을 주인공 이건(장혁 역)은 비서 탁실장에게 구사하기도 한다. 패러디된 많은 장면들은 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대중을 위로하는 환상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엘사의 마법처럼 아름다운 동화적 세계임을 제작진은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영화와 애니메이션 그리고 소설을 읽으며 얻은 감동을 아름다운 기억으로 간직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 기억들로의 여행을 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는 제공한다. 이미 알려지고 익숙한 소재들을 텍스트 내부에서 반복함으로써 대중들의 기억을 환기시켰다. 어쩌면 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가 많은 대중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이유는 기억의 반복에 있지 않은가 싶다.

   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가 일종의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지만 그것의 진실은, “누구나 괴롭고 고통스럽고 아프다. 그리고 우리는 위로가 필요하다.”가 아닐까? 오히려 텍스트의 내용보다 텍스트 그 자체의 존재 이유가 더 진실해 보인다. 우리는 현실에서 아파하고 고통 받으면서도 위로 받고 싶은 어린 아이들인지도 모른다. 어렸을 적에는 투정부릴 부모가 있었지만 지금은 그 역할을 TV 드라마가 대신한다. 라캉의 언어를 빌어서 말하자면, 세상살이에 고통 받고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치료하기를 반복하는 우리들은 고통 속의 쾌락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조히스트들인 것인가?

    때로 익숙한 것들이 마음을 울릴 때가 있다. 너무 익숙하고 식상했던 이야기가 어떤 고도의 예술 작품보다 감동으로 다가올 때 한 사람의 비평가로서 불안하거나 불편해지고는 한다. 이 비평가로서의 불안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 무엇인가 ‘낯설고,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로 인하여 ‘헐겁고, 익숙한 것’에 대해서 차갑게 응시하려고 노력한다고 할까? 정서의 속삭임을 억지로 밀쳐내고 눈의 습기를 부정하고픈 마음의 분열은 견디기 어렵다. 차가운 이성의 언어를 부정하고 전신에 퍼져나가는 슬픔의 정서는 논리적 언어를 허물어뜨리는 기이한 것이다.

    흔해 빠진 이야기들의 짜깁기로 보였던 TV 드라마를 보다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한 개인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 시청자가 보았던 TV 드라마는 아마도 십중팔구 비평가의 혹평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비평가의 비판과 상관없이 TV 드라마는 지속적으로 생산된다.) 아마도 완성도 높은 서사성과 시청각적 미학성을 갖추었다고 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TV 드라마를 시청하고 순수한 감동을 받은 시청자가 있다면? 더구나 그 작품이 많은 대중들에게 지지를 받고 비평가의 시각에 의심을 표현한다면 도대체 비평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고민스럽다.

    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는 가족 ․ 용서 ․ 사랑이라는 키워드를 적절히 배치해서 많은 사람들이 정서적 거부감 없이 시청 가능하도록 제작하고, 익숙한 스토리들을 재조합하여 만든 작품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많은 대중들의 동의를 얻었다. 부르주아인 남성과 착한 것이 개성인 순종적인 여성의 러브스토리인 <운명처럼 널 사랑해>는 익숙하고 결말이 예상되는 데도 시청자를 TV브라운관 앞으로 불러 모으는 힘을 지닌다.

    그렇지만 드라마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들이 21세기적 상황에 맞는지 의심스럽다. 예를 들어서 후대를 잇지 못해 장인화학이라는 대기업의 사장 자리를 위협받는 주인공이라는 설정과 순종적 이미지의 종갓집 며느리를 떠올리게 하는 김미영(장나라 역)이라는 캐릭터의 성격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현재의 옷을 입고 있지만 드라마를 지탱하는 가치들은 과거의 것이다. 또한 절실히 사랑했던 한 연인이 서로를 오해하게 만드는 기억상실 그리고 자신의 유전병 때문에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지기로 하는 남자의 결심은 많은 멜로드라마의 상투성을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가 인기 있는 것은 혹시 대중들이 무지(無知)하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아니, 대중들은 모두 알고 있으며, MBC 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가 지니는 상투성에 동의하고 있다. 각종의 블로그와 트위터 그리고 SNS를 통해 대중들은 소통하고 드라마를 즐긴다. 대중들은 작품이 하나의 아름다운 동화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환상이 당분간 지속되기를 원한다. 그러면 이제 비평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대중들의 소통관계에서 비평가의 자리는 모호해진다. 텍스트에 동의한 시청자들에게 비평이란 괜한 트집 잡기가 되어버리거나 혹은 불필요한 혼잣말이 되어버린다. 비평가는 TV드라마의 상투성을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스스로 비평가로서 책임을 다했다고 위안을 삼아야 하는 처지가 된다. 이것은 비평 행위 자체가 의미 잃은 상투적 문구의 나열로 전락하는 것은 아닌지 불안을 안겨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대중과 공감할 수 있는 비평을 할 수 있을까? 비평의 비판적 기능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비평이란 대상의 이해를 전제한 발화 행위라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드라마의 내러티브의 상투성을 비판하는 것이 상투적이라면, 반대로 드라마 <운명처럼 널 사랑해>라는 작품이 상투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상투성을 상쇄시키는 어떤 형식이 있지 않을까? 하는 물음을 던져본다. 그것은 카메라의 기법일 수 있고, 캐릭터의 특수성일 수도 혹은 배우의 연기일 수도 있다. 또한 사회에 대한 어떤 식으로의 반응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 어떤 것이 되었던 텍스트를 경유하는 징후들에 비판의 칼날만을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동반되는 상황과 이유를 먼저 이해하여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 관계들이 생산하는 의미는 비평가의 세계와 한계 속에 있을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