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피임의 계절은 따로 없지만요.
* 본 글에서는 ‘낙태’나 ‘임신중지’ 대신 의학 용어인 ‘인공임신중절’을 사용하였습니다. 다만 2019년 헌법불합치 판결을 받은 형법상의 ‘낙태죄’는 그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주제의 특성상 행여나 선정적인 글로 읽힐까 봐 송구스럽습니다만, 고민 끝에 불편한 이야기를 굳이 꺼내게 되었습니다.
* 본 글은 작년 이맘때쯤 pgr21.com 및 개인 웹사이트에 작성한 글로, 나름대로 시의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연말을 맞아 브런치에 다시 업로드합니다.
연말입니다. 크리스마스 계획은 있으신지요. 저 같은 산부인과 의사에게 연말이란 피임상담으로, 연초는 임신 확인으로 바쁜 계절입니다. 게다가 최근 낙태죄가 폐지되며 임신중절은 합법화의 길을 걷고 있어서 이에 대한 상담도 적지 않습니다. (개인적 사유로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만, 임신중절 문의는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많습니다.) 다만 이런 사례들을 너무 많이 목격하다 보니 여러 가지로 안타까움이 생길뿐더러, 법적인 판단뿐만 아니라 현황이 궁금해져서 관련한 논란과 자료를 좀 찾아보았습니다. 그중 많은 사람들과 꼭 공유하고 싶은 내용을 글로 정리해보았습니다.
2019년 헌법재판소 판결을 전후하여 인공임신중절의 합법화에 대한 찬반 공방이 뜨거웠다는 것은 많이들 알고 계실 것 같습니다. ‘원치 않는 임신’이라는 어려운 논쟁에 대해 몰두하다 보면 세상은 두 개의 선택지밖에 없는 흑백처럼 보입니다. 태아도 엄연히 살아있는데 생명권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요? 임신의 당사자인 임산부의 주체성과 자기 결정권이 우선일까요? 의학계나 여성계, 법조계, 종교계의 입장이 모두 관점에 따라 다르며, 절대로 간단히 결론을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조금만 방향을 바꿔서 생각해보자면, 왜 이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만 할까요? 인공임신중절이 개인의 사정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지일 수는 있을지언정, 이왕이면 애초에 안 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여전히 상당수의 인공임신중절은, 피임을 제대로 하지 않은 성관계의 결과인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당연히 있지요. 피임을 확실히 했는데 임신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인공임신중절을 선택하는 극히 드문 경우, 분명히 있습니다. 단지 아기 성별 때문에 임신중절을 원하거나, 반복적으로 임신중절을 일삼는 소수의 사람,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과격한 일부에 매몰되는 것은 전체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산부인과를 찾아와서 아기를 지워달라는 사람들은 그저 피임에 소홀했을 뿐, 보통의 도덕관념을 가진 보통의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엄마 손을 잡고 오는 여중생, 젊은 대학생 커플, 평범한 중년 부부들입니다. 예기치 않은 수술에 대해서 걱정하고, 뱃속의 태아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과거의 행동을 후회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저는 인공임신중절의 옳고 그름을 따질 생각은 없고, 단지 피임에 대한 강조를 한 번 더 하고 싶어서 이 글을 씁니다.
혹시 연말을 맞아 뜨밤을 계획 중이십니까? 성관계에 대한 합의만큼이나 피임에 대한 합의도 중요합니다. 남녀 간의 성관계는 언제라도 임신으로 이어질 수 있고, 원치 않은 임신의 많은 경우가 또다시 인공임신중절이란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립니다. 법적인 가불가에 앞서, 인공임신중절이 윤리적으로나 의학적으로나 바람직하거나 권장할만한 것은 아닙니다. 당연합니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해야 합니다. 그러니 피임을 할지 말지 여부와, 어떻게 피임할지 그 방법에 대하여 합의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혹시 성관계 대상이 무생물이거나, 동성입니까? 폐경 이후의 여성이거나, 임신 중입니까? 적어도 ‘피임’에 대해서 완전히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예외 상황은 별로 없습니다. 여성의 임신 가능성의 스펙트럼이란, 생각보다 넓습니다.
본인과 파트너(연인, 배우자 등 성관계 상대) 모두 피임을 전혀 하지 않는 경우를 제외하고 피임 실천 방법에 대해 복수응답으로 질문한 결과, 콘돔이 74.2%로 가장 많았고 뒤로 이어 질외사정법 42.6%, 월경주기법 23.1%, 경구 피임약(사전) 18.9%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중략) .. 임신 중단을 했을 당시 피임을 한 경우는 12.7%(콘돔, 자궁 내 장치 등)이었다.
47.1% 는 불완전한 피임방법인 질외사정법, 월경주기법을, 나머지 40.2%는 아무런 피임[응급 피임약(사후) 복용 포함]을 하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피임 실천율은 연령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절대적 실천율은 낮았으며, 혼인상태에 따른 차이는 유의미하지 않았다.
출처 : 2018년도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보고서
여러분의 피임은 안녕하십니까? 질외사정 피임은 성관계 도중 타이밍을 재주껏 맞춰서 여성 체외에 사정하는 방법입니다. 월경주기법(자연주기법)은 여성의 생리주기로 배란일을 추정하여 임신 가능성이 높은 시기를 피하는 방법이구요. 둘 다 성공률이 낮은 불완전한 피임법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나라 성인의 상당수가 질외사정, 자연주기법, 혹은 그냥 운에 맡기는 방법(우리는 이것을 무피임이라고 부르기로 했어요)을 택합니다. 환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렇게 도박을 하는 나름의 이유도 있습니다. 콘돔의 착용감이 싫다던지, 피임약을 먹는 것에 거부감이 있다던지…
그런데 인공임신중절을 경험한 사람들의 피임법을 조사해보면, 무려 87.1%가 무피임이나 불완전 피임을 시도했습니다. 물론 콘돔이나 피임약도 성공률이 100%는 아니지만, 질외사정법이나 월경주기법에 비할 바는 결코 아닙니다. 문헌에 따라 다소 차이는 있지만, 1년 기준으로 자연주기법의 피임 성공률은 76%, 질외사정법의 피임 성공률은 78%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지속적으로 이런 피임법에 의존한다면 거의 1/4에서 아기가 생깁니다. 그리고 말할 것도 없겠지만, 1/4만 생기는 아기는 없습니다. 일단 수정이 된 순간에 피임은 완전히 실패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이 새로운 생명을 어떻게 해야 할지 한없이, 정말이지 한없이 무거운 고민을 떠맡아야 합니다. 운에 맡기는 방법은 너무도 무책임하니 논할 가치조차 없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외사정으로 피임을 시도하는 만큼, 질외사정법이 갖는 실패 확률에 주목해볼까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는 ‘결정적 순간’에 대략 비슷한 비율로 실패하는 사례가 있습니다. 축구의 페널티킥입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페널티킥 성공률이 75% 정도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선호(?)하는 질외사정, 자연주기법 피임의 누적 성공률과 비슷하네요. 확률만 비슷한 것이 아닙니다. 승부차기는 이론적으로야 무조건 키커에게 유리합니다. 골키퍼의 반응속도보다 날아가는 공의 속도가 더 빠르기 때문이지요. 숙달된 키커가 구석으로만 차면, 원래는 성공률이 훨씬 높아야 합니다. 질외사정법도 이론적으로는 일리가 있겠죠. 남성이 사정을 완벽히 통제할 수 있다면 말이지요. 그런데 실제로는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겁니다. 심리적 압박의 영향도 어마어마할 테구요. 물론 승부차기의 성공률은 1회성, 피임법의 성공률은 누적이므로 통계적 함의는 다릅니다만, 이 비유에서 기억할 만한 유익한 사실은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 모두 결정적인 축구 시합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무한 PK 실축을 여러 번 봤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날고 기는 세계 최고의 스타 선수들이…
세상에는 훌륭하고 검증된 피임법이 이미 존재합니다. 그것도 한 두 개가 아니고 여러 가지입니다. 콘돔은 성병 예방 기능이라는 특별하고 중요한 능력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대로만 착용한다면, 간편하면서도 준수한 피임법입니다. 여성호르몬을 활용한 피임법은 먹는 피임약, 자궁 내 장치, 주사, 피부 밑 삽입 장치처럼 방법도 다양하고 성공률이 대단히 높습니다. 월경불순 등의 증상을 치료하기 위해서도 쓰는 만큼 부수적인 장점도 있습니다. 또한 보다 장기적이며 반영구적인 수술적 피임법도 있지요. 정관수술이 여기 해당되겠군요. 남녀가 합의하여 자신들에게 알맞은 것을 골라서 쓸 수 있으며, 사용법, 사용 기간과 부작용이 제각각이므로 이왕이면 상담을 거쳐 선택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다고 하겠습니다. (만약 미처 사전 피임을 챙기지 못한 불가피한 경우에는, 사후 피임약이라는 응급조치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질외사정이나 자연주기법을 주된 피임법으로 삼는 것은 그 어떤 전문가도 추천하지 않을 것입니다. 페널티킥 실축은 아무리 나빠도 결과가 패배이니 어찌 보면 다행이지만, 피임의 실패는 피해의 규모가 결코 그 정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임신을 원하지 않는 상태에서 불확실한 피임에 기댄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걸고 도박을 하는 것입니다.
연예인의 자살 뉴스는 하단에 우울증과 자살사고에 대한 상담정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담뱃갑에는 반드시 폐암 경고문을 부착해야 합니다. 흡연도 자살도 불법이 아니지만 사회 차원에서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한국 사회는 인공임신중절에 대해 형법으로 처벌하지 않기로 했고, 아마도 가까운 시일 내에 법제화가, 이어서 양성화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평생 금욕으로 살 것이 아니라면, 피임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공적 영역에서도 보다 풍성해져야만 합니다. 부디 이 글이 불편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저는 통계를 근거로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한 것이니, 혹시나 원치 않은 임신으로 힘든 기억이 있으신 분들에게는 상처가 되지 않았기를 조심스럽게 바라봅니다.
3줄 요약
피임에 대한 합의는 성관계에 대한 합의만큼이나 중요합니다.
가능하다면 성공률이 높은 피임법을 택해야 하며,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이중 피임을 할 수 있습니다.
질외사정법, 자연주기법을 통한 피임은 권장하지 않습니다.
<자료 출처>
2018년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 보고서
https://www.acog.org/womens-health/infographics/effectiveness-of-birth-control-methods
https://www.cdc.gov/reproductivehealth/contraception/index.htm
https://www.who.int/health-topics/contraception#tab=tab_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