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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난포 Jun 12. 2024

보상 - 책 쓰기가 가져온 뜻밖의 이득

아기를 낳으면, 엄마 몸이 건강해진다.

임신을 하면 신체에 각종 변화가 일어난다. 일반적으로는 이 '신체 변화'가 그리 달갑지 않다. 이를테면 나는 배에 튼살이 생기고 가슴은 처졌으며 머리털이 잔뜩 빠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회복하기는 했지만, 요실금과 관절 통증도 고생스러웠다. 그런데 아기를 낳으며 생기는 또 다른 차원의 신체 변화도 적지 않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아기를 낳으면 (어떤 면에서는) 건강해진다. 애를 낳은 사람은 암에 덜 걸린다. 출산은 자궁암, 난소암, 유방암의 발병 위험을 낮춘다. 이는 의학적으로 여러 번 명백하게 증명된 사실이다. 임신의 '보호 효과'의 정확한 원리는 아직 완전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호르몬 변화가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자, 지금 내 이야기를 듣고 시큰둥할 당신의 표정이 상상된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암에 덜 걸리려면, 지금이라도 임신하라고? 물론 그런 뜻은 아니다. 출산하지 않는다고 해서 무조건 암에 걸리는 것도 아니다. 다만 출산은 단순히 '몸 망가진다'라고 치환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경험이며, 암 예방은 임신-출산의 가장 대표적인 부수적 효과이다. 우리가 출산 후 외적인 면에 눈길이 먼저 가기 때문에, 장기적인 건강 효과는 주목도가 떨어질 뿐이다. 어찌 되었든 아기를 낳는 일에는 뜻밖의 이득이 존재하며, 기억해 두어서 나쁠 것도 없다!


출산의 배신은 실용서가 아니다. 그런데 글을 쓰며 의외로 나 자신이 실용적인 이득을 봤다. 딱히 덕 보겠다고 책을 쓴 것은 아닌데, 부가적인 효과가 있더라는 뜻이다. 이것은 아마도 글쓰기라는 작업이 갖는 속성 덕분인 것 같다. 경험이 되었든, 지식이 되었든 생각활자로 표현하면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게 된다. 그러면서 저절로 좋은 일이 일어난다.


글쓰기는 강제로 멀리서 보기와 두루 보기를 가능하게 해 준다. 활자로 자신의 상황을 펼쳐내면, 그 순간 그것은 나의 외부에 존재하게 된다. 글씨나 문장을 어떤 실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신기하게 그런 힘이 생긴다. 우리는 쓰기를 통해 나 자신, 혹은 나의 내면에 있는 관념을 마치 남처럼 관조할 수 있다. 떼쓰기가 심한 어린 자식을 두고 화가 치밀 때면 옛 어른들이 하는 말씀이 있지 않는가? 이 애가 내 애가 아니고, 옆집 애다~라고 생각해 보라는 조언 말이다. 원래 내 자식의 말썽에는 깊숙이 몰입하다 보니 더 감정이 격해진다. 하지만 옆집 아이에게는 그러지 않는다. 우리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음, 옆집 아기가 졸려서 짜증이 나는가 보구나. 잠을 푹 자면 나아지겠지.' 정도로 담담하게 생각할 수 있다. 느낌이 글이 되는 순간, 나의 감정은 '내 자식'에서 '옆 집 아이'처럼 관조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래서 감정을 다스리는 것에도 글을 쓰는 것이 유익하다.


현실적 문제 상황에 대응할 때에도 읽고 쓰는 작업이 힘을 발휘한다. 이를테면 아기가 자주 울어대서 초보 엄마로서 좌절감을 느낄 때, 일부러 가장 멀리 떨어진 원인까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내가 글을 쓰며 재생산에 대해 탐구하던 주된 방식 중 하나이다. '애초에 인간의 아기들은 왜 이렇게 자주 울게 되었을까?' 물론 생뚱맞고 뜬구름 잡는 공상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당장 빽빽 울어대면 분유 타고 기저귀 확인하고 어르고 달래느라 얼마나 정신이 없는데! 하지만 현실의 소란이 잠시나마 잦아들었을 때, 원거리 원인까지 생각의 물꼬를 멀리 데려가면 시야를 넓혀서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고찰이 활자로 쓰이거나 해독된다면 문제 상황 속에서도 나름대로 의지할만한 논리와 질서를 획득하게 된다.


내가 산부인과 의사이긴 하지만 엄마는 역시 처음이기에, 나의 임신과 출산에도 나름의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이 애매한 '어려움'을 관찰을 거듭하여 언어화해놓고 보니, 신기하게도 상황이 다소나마 나아졌다. 객관적인 현실이 변한 것은 아닐지언정, 나의 상황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뀐 것이다. 자신감이 생겼달까. 나는 고통과 혼란의 우물 안에 빠진 채로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아니고, 우물 밖에서  정체를 지켜보고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더 나아가 거시적 맥락을 이해하고 납득할 수도 있었다. 너무 거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글 쓰는 이들은 이 미묘한 감각에 공감할 것이다. 그저 써내리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주도권이 생기는 듯한 느낌!


글쓰기는 거리 두기이다. 터져 나올 듯한 비명, 내 안의 요동치고 끓어 넘치는 감정, 나를 금방이라도 휩쓸어버릴 것 같은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출해 버리면, 그것은 글쓰기가 아니다. 그저 비명 지르고, 소리치고, 울고 끝나는 일이다. 그러나 글쓰기는 그런 나를 집요하게 바라보는 또 다른 내가 하는 일이다.

『우리는 글쓰기를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정지우


내가 나의 출산과 육아를 수월하게 하려고 책을 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글쓰기라는 특별한 작업이 갖는 장점이 실제로 도움이 되었다. 쓰기에는 예상치 못한 득이 있었다. 행복은 음미할 수 있게 되고, 고통은 어루만질 수 있게 된다. 지식에 체계를 부여할 수 있고, 막연한 느낌을 논리로 승격시킬 수 있다. 쓰기란 대단히 자율적인 정신 활동이므로, 마치 나의 자율을 상실하는 듯한 출산의 격변기에 중심을 잡아주기도 했다. 그러니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의 글쓰기에생각지도 못한 장점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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