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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난포 May 28. 2024

편집 - 내 원고의 가지치기

더 큰 그림을 위한 세포의 죽음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는 영원하지 않다. 이들은 죽음을 맞는데, 스스로 소멸을 택하기도 한다. 이를 세포사멸(apoptosis) 또는 programmed cell death라고 부른다. 세포가 공격을 받거나, 손상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죽어버리는 것과는 다르다. 용어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이, 자발적이며 계획적으로 신체 구성을 편집하는 과정에 가깝다. 

태아 시기에는 이 세포 사멸이 특히 중요하다. 특정 부분을 덜어내는 방식으로 우리는 몸의 구조를 더욱 정교하고 완성도 높게 만들 수 있다. 가장 직관적인 예시가 우리의 손가락이다. 손과 발은 애초에 넙데데하게 뭉뚱그려진 한 덩어리로 시작한다. 그러다가 손가락 발가락 사이사이를 이루는 부분들이 사멸하기 때문에 우리는 섬세하고 유용한 다섯 손가락, 발가락을 가질 수 있다. 하나의 생명이 탄생할 때, 무조건 늘어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때로는 계획적으로 후퇴하는 것이 더 큰 그림을 위한 전략이다.   


초고가 어느 정도 틀을 갖추고 나서는 일차적 편집 작업이 필요하다. 나는 생초보 작가이니, 편집을 거치면 원고가 빨간펜 범벅이 되어서 돌아올 줄 알았다. 개떡 같이 써놔도, 찰떡 같이 고쳐주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었다! 명백한 맞춤법 실수나 오탈자는 감쪽같이 없어졌지만, 편집자가 임의대로 글을 고치거나 내용을 삭제하지 않았다. 너무 이상한 부분만 '다시 써 주시면 좋겠습니다.'라는 점잖은 메모가 붙어 왔는데, 그조차도 손에 꼽을 만큼 적었다. 아니, 이게 맞는 거야? 화들짝 놀란 나는 파일을 잘못 보내신 줄로 알고 연락을 했다.


 "선생님, 그, 제가 이메일을 받아봤는데요... 원고를 바꾸질 않으셔서요. 이게 맞나요? 잘못 보내신 거 아닐까요?"

"작가님, 제대로 보낸 거 맞습니다. 메모 남긴 부분은 잘 살펴 주시고요, 다른 부분은 원하시는 대로 마음껏 하시면 됩니다."


출판사는 놀라울 정도로 나의 의견과 방향성을 존중해 주었다. 나는 자율권이 있었고, 동시에 책임이 있었다. 감사하기도 했지만, 당혹스럽기도 했다. 은근히 편집믿고, 알아서 멋지게 만들어 주는 줄로 기대했는데... 심지어 내 글이 저절로 수준이 높아지길 바라는 놀부 심보마저 있었다. 이때까지 내가 '출판'해본 글이라곤 의학 논문이 전부다. 이런 학술적인 글들은 동종업계 전문가가 검토를 하며 논리의 허점을 짚어내고, 저자가 방어와 보완을 하면서 차츰 완성도가 높아진다. 그래서 어느 학술지에 등재되었다고 하면, 어느 정도의 수준이 자연스럽게 보장받는다. 하지만 대중서는 그럴 수 없다. 원고의 총체적 질과 수준의 최종 책임자는 어디까지나 작가 본인이다. 책의 종류에 따라, 혹은 출판사와 담당자마다 차이는 있겠으나 편집의 가장 핵심적인 역할은 교정, 교열이다. 


정신이 번쩍 든 나는 딱 이때부터 놀부 심보를 버리고 내가 글을 손수 빗질하기 시작했다. 눈에 잘 들어오게 하기 위해 원고 전체를 인쇄해서 출퇴근길에 늘 끼고 다녔다. 부자연스러운 문장과 단어를 고쳐 썼다. 순서가 알맞지 않은 문단과 꼭지는 제자리를 찾아 넣었다. 비유가 적당하지 않으면 다시 고민했다.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한 표현을 삭제했다. 두꺼운 종이뭉치가 빨간펜 범벅이 되어 갔다. 편집을 할 즈음에는 아기가 책상에도 곧잘 기어올라갔기 때문에... 아기가 흘리는 홍수 같은 침과 종이 찢기 신종으로부터 이 소중한 원고를 지키는 것이 주요 임무가 되었다. 


아기 손에 닿은 모든 종이는 이렇게 된다.


초고를 쓸 때, 나는 조사한 자료와 논문을 모두 때려 박아 '전문가'다운 책을 쓰고 싶은 욕심과, 사전 지식 없이도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은 욕심 사이에서 깊은 갈등에 빠졌다. 대중을 상대로 과학 강의를 할 때처럼, 깊이와 넓이에 대해서 고민을 해야 했다. 일단 과학교양서의 마니아들은 수준 높은 지식, 기존에 모르던 내용을 선호한다. 작가의 사적인 이야기는 배제하고, 책에 어느 정도의 권위를 실어 주는 것이 좋다. 소위 잘 나가는 과학 교양서들은 대체로 그렇다. 나름 과학책인데. 쉬운 얘기, 뻔한 얘기만 할 수는 없다. 


나는 그날도 아기를 재우고 눈이 빠져라 논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루 종일 아기 돌보고 밤이 되면 나도 힘이 하나도 안 남는데, 빼곡한 영어 문헌을 읽자니 머리에 안 들어왔다. 아무래도 같은 글자를 계속 읽고 있는 것 같았다. 발음도 어려운 외국 과학자 이름과, 그들의 연구에서 인용할 만한 통계 수치를 적고 있자니... 정녕 이것이 맞는 방향인가?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만 해도 이 글을 읽기가 고통스러운데. 독자에게 그런 정신적 중노동을 강요하는 것은 순전히 나의 욕심 아닐까. 바쁘게 아기를 키우는 사람들이, 하루가 고단한 임산부가 읽어주길 바란다면 내 글을 좀 더 부드럽고 순하게 만들어야 할 것 같았다. 


나의 경우, 셀프 편집의 핵심은 덜어내기였다. 너무 어렵거나 구체적인 개념은, 그 개념을 소개하기 위한 설명이 길어지기 때문에 글이 장황해진다. 정확한 숫자와 문헌을 인용하는 것은, 글의 신빙성과 설득력을 높이지만 한편으로 술술 읽히기는 어렵게 만든다. 물론 그런 책도 필요하다. 견고한 과학적 사실과 논리 전개에 충실하고, 새롭게 발견된 최신 지식을 전파하기 위한 책도 있어야 한다. 하지만 『출산의 배신』은 방향성이 달랐다. 편집 과정에서 나는 쉽게 읽히는 글로 노선을 잡기로 마음을 먹었고, 수치와 학술 용어와 외국 학자의 이름을 원고에서 상당 부분 없애버렸다. 대신 가볍게 공감할 만한 개인적 에피소드를 넣었다.


애써서 조사한 내용을 덜어내는 것이 고통스럽기는 했다. 혹시 동료 의사들이 뭐 이런 수준 낮은(?) 글을 쓴다고 비웃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교양/과학 마니아층이 내 책은 신변잡기에 불과하다고 냉대할 것이라는 예상도 했다. 어찌 되었든 갈림길에서의 선택은 이루어졌다. 혹시라도 내가 반대쪽 선택을 했다면, 참고 문헌을 배로 늘리고 나의 개인적 경험 이야기를 지웠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결정한 노선에 집중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과감하게 가지치기하는 일도 필요하다. 


세포가 자멸하는 일은 손가락 사이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혈관의 구조, 신경관, 중격과 같은 다양한 신체 구조물들이 사멸이라는 편집을 거쳐야 정상적인 발달을 한다. 이렇게 세포가 분열(늘어나기)과 사멸(없어지기)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은 둘 중 한 가지만 있을 때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정교하게 발달을 조절해 낸다. [1] 글을 가지치고 빗질하는 것도 비슷한 강력함을 갖는 것 같다. 편집을 거치며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고, 섬세하게 완성도를 높일 수 있다. 


<참고 문헌>

[1] Voss, A. K., & Strasser, A. (2020). The essentials of developmental apoptosis. F1000Research9, F1000 Faculty Rev-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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