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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구석 난포 Jun 26. 2024

마무리 - 모두의 힘을 빌려줘

협력이 빛나는 탄생의 과정

육아에 조력이 필요하다는 것에 이제는 많은 이가 동의한다.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격언이 약간은 진부할 지경이다. 그런데 아기를 낳는 일에도 수많은 조연들의 노력이 있다. 직접 아이를 품고 낳는 엄마의 역할이 절대적이긴 하겠으나, 그 과정이 원활하도록 돕는 이들의 역할도 결코 작지 않다. 나 같은 산부인과 의사가 바로 그런 일을 한다.

애는 기다리기만 하면 저절로 나온다며, 병원들이 괜한 호들갑을 떤다고 핀잔을 주는 이들을 아직도 가끔 만난다. 동물 암컷들도 알아서 출산을 혼자 해내는데, 사람이라고 뭐 다르겠냐는 주장이다. 참고로 출산을 서로 돕는 것은 호모 사피엔스의 유구한 전통이다. 인간 태아는 뒤를 보며 나오기 때문에 산모가 스스로 받을 수 없다. 인간의 산통은 더 길고, 태아는 비례적으로 더 크기 때문에 산고는 만만히 여길 것이 아니다. 사람이 꼭 동물 따라 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오히려 이렇게 중요한 일에 여럿이 힘을 보탠다는 것이 더 멋지고 의미 있는 사실이다.


출간 작업 전에는 미처 잘 몰랐던 사실이 있다. 책이라는 공간을 채우는 것은 꼭 작가의 글만이 아니라는 사실! 원고를 쓰는 과정은 나 자신과의 외로운 투쟁(?)에 가까웠다. 그런데 마무리가 가까워 올수록 여럿의 손길이 더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를테면 모든 책에는 ISBN 넘버와 '잘못 만들어진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라는 문구가 꼭 들어가는데, 당연히 작가가 쓰지 않는다. 전적으로 책을 펴내고 유통시키는 출판사가 해주는 일이다. 책의 제목, 목차와 전체적인 배열을 만드는 데에 편집자의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표지 디자인과 일러스트를 만들어 준 센스 넘치는 디자이너도 책에 중요한 기여를 보탰다. 만약 번역서라면 옮긴이의 중요성을 절대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더불어 내 책에는 추천사와 감수사라는, 무척 감사한 글이 자리하게 되었다.


모든 책에 꼭 추천사가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래도 이름난 사람의 한 말씀이 있어야 좋긴 좋을 것만 같지 않은가? 나도 고심 끝에 추천사를 부탁하게 되었다. 아무래도 지인이나 인맥을 활용하게 되는데, 내게는 과학저술가 양성과정에 참여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 내 글쓰기 멘토를 맡아주신 하리하라 이은희 작가님께서 감사히도 선뜻 추천의 글을 써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중고생 시절 작가님이 쓴 책을 읽으며 이과계열 진학을 하게 되었는데, 십수 년이 흘러 내 글에 추천의 말씀을 보태 주시니 더할 나위 없는 영광이다.  경우엔 개인적 인연으로 이은희 작가님과 연결된 것이긴 하지만, 생명과학을 아우르는 분야에 전문성이 높고 진솔한 평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독자 입장에서도 무조건 유명인사의 추천보다, 주제와 충분히 어울리는 분이 더 진정성 있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이다.


한편, 추천사 전에 내용 감수를 부탁하는 과정도 있었다. 감수를 해주신 서울대학교 인류학과의 박한선 교수님은 나와 아무런 인연이 없다. 출판사에서 먼저 제안한 것도 아니다. 내가 막무가내로(?) 들이민 것에 가까운데... 사정은 이렇다. 《출산의 배신》 본문에 진화론과 인류학 내용이 제법 많이 등장한다. 나는 일개 의사이니, 나의 기존 지식을 넘어서는 분야이다. 그 부분을 소화하기 위해 책과 논문을 읽으며 공부를 했다. 진화론을 인간에게 적용시키는 큰 얼개를 이해하기 위해 읽은 책은 존 카트라이트의 《진화와 인간 행동》이다. 대학에서 입문 교재로 활용될 정도로 내용이 방대한 이 벽돌책을 번역한 분이 박한선 교수님인데, 정신과 의사 출신이면서 인류학을 연구하신다는 독특한 이력 때문에 기억에 남았다. 그 책 이외에도 진화와 인류를 다룬 책을 여럿 쓰셨기에 참고를 위해 꾸준히 읽던 중 생각이 미쳤다.


과연 비전공자인 내가 진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글을 쓴 것이 맞을까?
이 분이 혹시 모를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주시면 참 좋겠다...


내 글은 완성 단계에 이르기까지 나와 출판사 말고는 아무도 읽어보지 않았다. 다른 출간 후기 글을 읽어보면, 가족이나 동료들이 작가를 위해 글을 곧잘 검토해 주고 조언을 주던데... 아쉽지만 우리 집은 그럴 사정이 아니었다. (심지어 남편은 아직까지도 내 책을 읽지 못했다!) 각자가 바쁜 근무와 육아를 분담하느라 너무나 여유가 없었다. 의사 동료들도 생각해 보았지만, 의학 지식이 주된 내용이 아니기에 큰 의미가 없었다. 또래 친구들에게 감상을 부탁해 볼까? 하지만 대부분 아기 키우느라 정신이 없는 것은 우리 가족과 마찬가지다... 나는 이런저런 사정으로 내 글에 대한 아무런 피드백을 수용하지 못한 채로 출판이 되어버리는 것에 두려움이 생겼다. 내 책이 전문서나 학술서는 아니지만, 최소한 틀린 내용은 없어야 하는데.


그래서 박한선 교수님이 감수를 선뜻 맡아주셨을 때 진심으로 기뻤다. 일단 글의 부족함과 오류를 바로잡을 귀한 기회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감수사까지 받아보게 되었다. 나에게는 바로 그 글이 내 책에 대한 최초의 감상이었다. 얼마나 감격했을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인류 진화사의 초기부터 아기를 낳아 키우는 여성의 곁에는 늘 ‘여성과 함께’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산모의 어머니였고, 경험 많은 산파였으며, 그리고 이제는 과학적 지식으로 무장한 산부인과 의사입니다. 비인간 동물에게 임신과 출산, 수유의 과정은 어미와 새끼, 둘만의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릅니다. 수백만 년 전부터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일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책은 그러한 오랜 인간적 노력의 하나입니다.

《출산의 배신》 감수의 글 중에서 -박한선


어디선가 '책의 완성은 독자'라는 말을 주워들은 기억이 있다. 내 책의 첫 감상을 접하고 나니, 당시에 흘려들은 그 말이 정말이구나 싶었다. 책이란 메시지의 형태이되, 더 중요한 것은 그로부터 시작되는 대화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노력을 보탠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등장하면, 거기서부터는 새로운 생명력을 가진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태어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에게는 책쓰기라는 이 강렬한 경험이 여러 모로 '출산'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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