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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Jul 11. 2021

한여름밤의꿈

그날의기억들_내가 입사한 이유_내가 퇴사한 이유

그 해 여름은 지독히도 더웠다. 여름이 더운 거야 자연의 이치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해는 유독 더웠다.


싸이의 말춤이 전 세계를 강타하면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기도 했고, 세상 신기한 하얀 고래, 벨루가를 보겠다고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이기도 했다. 전 세계 100개가 넘는 나라에서 모여든 사람들이 매일같이 전통 공연을 펼치고, 자국 문화를 소개하며 한데 어울리는 축제의 장이었기 때문이다.


100일을 여수에 있었지만 한 번도 보지 못 한 벨루가. 3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시 만나 볼 수 있었다.

2012년 여름, 나는 여수에 있었다. 공익이 끝나자마자 기차를 타고 여수로 내려가 93일 동안 매일같이 엑스포장을 누볐다. 숙소였던 엑스포타운 아파트에서부터 4문 게이트를 지나 국제관 D동의 사무실까지 하루에도 서너 번씩 오르내렸다. 크루즈가 들어오는 2문 게이트가 내 담당 구역이긴 했지만 국가별 전시관과 주제별 전시관에도 운영인력들이 있었기에 박람회장을 끊임없이 뛰어다녔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받은 월급의 1/3은 음료수 값과 세탁비로 들어갔을 것이다. 생수보다 탄산과 이온음료를 사랑하는 나는 평소에도 물 대신 콜라/사이다/이온음료를 1L 이상 마시는데, 여름철에 땀을 흘리면 2배, 3배로 마셔야 했다. 땀을 원체 많이 흘리다 보니 머리만 하루에 4번씩 감았고, 아침에 출근할 때 한 번, 저녁에 다시 한번 옷을 갈아입어야 했다. 세탁소를 일주일에 2번씩 가야 했는데 가뜩이나 남들보다 옷의 부피도 크다 보니 빨래 값이 어마어마했다.


그렇게 지독했던 여름이 지나갔다.


25살. 여수엑스포는 아르바이트를 제외한 첫 사회생활이자, 훈련소와 유럽 여행 한 달을 제외한 첫 타지 생활이었다. 친구가 아닌 회사 사람들과 몇 달 동안 24시간을 부대끼는 일은 넌씨눈인 나로서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는 것에 급급하다 보니 이래저래 지쳐갔다.


마냥 안 좋았던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여수엑스포를 거치면서 부모님을 따라다니면서 막연하게 갖고 있던 여행에 대한 호기심과 호텔에 대한 동경이 MICE 산업에 대한 꿈으로 발전한 것이다.


매일같이 박람회가 개장하기 전인 7시부터 10시에 폐장한 이후까지 15시간 이상을 신경 써야 하는 업무는 정말 힘든 일이었지만,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없다는 사실 쯤은 알고 있었다. 똑같이 힘들다면 이왕 하는 거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엑스포는 그런 점에서 최고의 무대였다. 매일매일 선보이는 색다른 공연과 국가관에서 전 세계 나라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은 마치 해외여행을 하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여수엑스포에서 나눠준 국가별, 전시관별 뱃지들. 돈도 벌고 간접적이나마 해외여행도 하고 일석이조라고 생각했다.

여수엑스포를 마치고 2학년 2학기로 복학하면서 진로를 결정했다는 것, 나름 사회생활을 해봤다는 것만으로도 참 든든했다. 4학년 2학기가 될 때까지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조차 정하지 못한 친구들이 제법 많은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빠른 시기에 진로를 정한 셈이었다.


내가 취업이 잘 될 거라고 믿었던 이유였다. 절대로 안 될 수가 없다고 믿었던 이유였다. 남들처럼 공고가 뜰 때마다 ‘묻지 마 지원’하는 게 아니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이었으니까. ‘여수엑스포’라는 남들이 해보지 못한 나름 특별한 현장 경험이 있었으니까.


마치 사춘기 소년이 자신의 풋사랑을 운명적인 사랑이라고 착각하듯이 ‘날 안 뽑을 리가 없지, 훗.’하는 근자감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근자감의 결과는 전패였다. 10군데 남짓밖에 안 쓰긴 했지만 나름 관련 분야로 골라서 썼는데도 단 한 건의 서류조차 통과되지 않은 것이다.


쓰라린 현실을 맛보고서도 정신을 못 차린 나는 코엑스에서 근무하시는 분을 만나 현실적인 조언을 구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미적미적 미루다가 기회를 날려버렸다.


“여수는 잊어버려. 

네가 뭐 대단한 거라도 한 거 같지? 

그거 아무도 인정 안 해줘. 

준비 제대로 해야 돼.”


그때 이모님께 호되게 혼나면서 한 마디 들었을 때의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어쩌면 나는 2012년 여수에서의 꿈을 아직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주변에서 ‘주임님, 주임님’ 불러주니 정말 대단한 뭐라도 된 것 같은, 그런 착각 속에 빠져 있었던 셈이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위포트의 취업 컨설팅 프로그램과 취업스터디, 학교의 취업동아리, 마케팅 관련 실무 교육과 제라스의 디자인, 기획, 스피치 수업까지 2년 가까이 쏟아부었다. 리조트와 관광공사, 코엑스, 킨텍스 등 MICE 분야만 쓰지 않고 대기업부터 중소기업까지 마케팅 직무면 쓸 수 있는 거의 모든 기업을 쓴 후에야 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중소기업에 불과했지만 그토록 원했던 MICE 업계에서 나름 잘 나간다는 기업이었으니 그거면 됐다 싶었다.


슬프게도, 8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느낀 것은 대행사의 한계, 중소기업의 한계, 개인의 한계뿐이었다. 입사 후 인천공항, 이천, 킨텍스, 코엑스 등 많은 행사장을 다녔지만 여수엑스포에서 만난 달콤한 이야기는, 없었다. 심지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갈아 넣고 있었는데도 내가 남은 것은 지독한 배신감과 자괴감, 상처뿐이었다.


여수엑스포 덕분에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나름 열심히 살아왔다. 하고 싶은 일을 해보겠다고 노력했고, 입사 후 정말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했다. 덕분에 MICE 업계에 대한 미련도 없고,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고 있으니 이제는 조금 덤덤하다.


한 가지 슬픈 건, 여수엑스포 이후 뭐라도 된 줄 알고 살아왔는데, 뭐라도 될 줄 알고 살아왔는데 그때보다 발전하지 않은 것 같다는 사실이다.


마치 한여름 밤의 꿈처럼...


이제는 정말로 꿈에서 깨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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