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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Oct 17. 2021

길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이탈리아보다 히말라야

   “길이라는 것이 어찌 처음부터 있단 말이오. 한 사람이 다니고, 두 사람이 다니고, 많은 사람이 다니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법. 나 또한 이 썩은 세상에 새로운 길을 내고자 달려왔을 뿐이오.”


   2003년, 한국 드라마 최초로 ‘폐인’을 양성하며 신드롬을 일으켰던 다모의 마지막 회에서 장성백이 남긴 유언이다. 한창 무협 소설에 심취한 상태에서 무협 소설을 보는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던 부모님과 담임 선생과 지긋지긋하게 싸우던 시절, 명문대 진학과 대기업 진학만이 정답이라고 강요하는 분위기가 혐오스럽던 질풍노도의 시기에 다모를 보게 되었고, 장성백의 유언, ‘정해진 길은 없다.’라는 말은 내 신념이 되었다.


  정해진 길이 없다니. 억지로 하기 싫은 공부를 하는 것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다는 치기 어린 생각을 하는 고딩에게 이보다 멋진 말이 있었을까. 비록 장성백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지만, 우리는 위인전을 보면서 콜럼버스처럼 새로운 길을 개척한 사람들을 수없이 많이 보았다. 장성백의 대사는 잊고 있던 위인들을 되새기게 했고, 남들이 가는 길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가도 괜찮지 않을까? 라는 희망을 품게 만들어 주었다. 아마도 등산을 하면서 정해진 메인 등산로가 아니라 온갖 샛길을 헤집고 다녔던 버릇 때문에 더 쉽게, 더 깊게 공감했을 것이다.


  그래서 괜찮았다. 아무리 담임 선생에게 혼나고, 부모님이 잔소리를 해도, 친구들이 아저씨 같다고 놀려도, 당구를 거지같이 친다고 욕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길은 정해져 있지 않고 새로운 길을 내면 그만이니까. 언제나 나는 혼자였고, 새삼스럽게 남들과 같은 길을 갈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남들이 인정해주거나 말거나 내 선택이 더 중요했으니까. 그렇게 나는 나만의 길을 내기 위해 내 멋대로 살았다. 문자 그대로 개쌍마이웨이로.


  내 마음대로 수업 시간표를 짤 수 있는 대학교는 그야말로 내 세상이었다. 친구들이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거나 말거나 내가 듣고 싶은 과목만 골라 들었다. 사학과에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의 한문 원문을 해석하며 진땀을 흘리고, 미디어커뮤니케이션 학과에서 대학등록금 반값을 주제로 홀로 반대쪽에 앉아 28:1 토론하기도 했다. 하도 타과 전공을 기웃거리다 보니 남들은 1,2과목 들으며 여유 있게 취업 준비하는 4학년에 전공 학점을 채우기 위해 전공을 4개씩 들어야 했다. 친구들이 인턴을 하고 토익과 자격증을 공부하는 동안 나는 여수엑스포 행사를 다녀온 경력에 우쭐해 동아리 활동만 열심히 했다.


  4학년을 마치기 전까지만 해도 잘 풀릴 거라고 생각했다. 모두가 원하는 잘 뚫린 고속도로는 아니지만 비포장도로라도 길은 길이니까,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일반적인 대기업을 가기에는 부족할지 몰라도 내가 원하는 BTL 마케팅 분야에서는 무조건 합격할 수 있을거라고 자만했다. 하지만 현실은 비참했다. 면접은 고사하고 서류 통과조차 어려웠다. 삼성, 현대, LG 같은 인기 있는 대기업은 고사하고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중소대행사와 블라인드 테스트를 본다는 공기업들조차 나를 환영하는 곳은 없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제이라이프스쿨을 다니게 되었다. 마케팅 분야에서 요구하는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디자인 클래스 수업을 듣기 시작했고, 면접을 위해 한국어 스피치 수업도 들었다. 단순한 스피치가 아니라 테드 강연이나 세바시처럼 어떤 인사이트 있는 스피치를 나누는 곳이었는데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동료를 만들어라.’는 말이었다. 같은 목표를 가진 동료가 있으면 서로 정보도 공유하고, 서로가 부족한 부분도 매워주고, 또 서로에게 자극도 되면서 혼자할 때보다 훨씬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학원에서는 적극적으로 스터디를 권장했고, 수업이 없는 빈 강의실에서는 각종 스터디를 하는 모임이 자유롭게 열렸다. 나도 글쓰기 스터디에 참가해서 꾸준히 글을 쓰며 사람들과 피드백을 주고 받았다. 그 덕분일까. 제라스를 다닌지 1년 6개월 만에 취업에 성공했다.


  그제서야 장성백의 대사가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장성백은 분명 세상에 없던 길을 내기 위해 달려왔다. 하지만 그는 ‘한 사람이 다니고, 두 사람이 다니고, 많은 사람이 다니면’이라는 전제를 붙였다. 장성백 혼자 길을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장성백을 따르는 수많은 동료들과 ‘함께’ 길을 만든다는 의미였다.


  잊고 있었다. 70년 만에 폭설이 내려 길이 없어진 히말라야에서도 무사히 트래킹을 마칠 수 있었던 이유도 함께하는 셰르파들과 친구들 덕분이었는데. 나 혼자였다면 아마 수십번도 더 포기했을텐데.


  2015년 대학생의 마지막 겨울방학을 앞두고 마지막 일탈(?)을 위해 네팔 해외 봉사를 다녀왔었다. 마낭이라는 어느 산골 마을에 도서관을 짓는 프로젝트였는데 우리가 흔히 아는 에베레스트니 K2니 하는 유명한 산에 비하면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해발고도 3000m~4000m를 오가는 고산지대다 보니 고산병과 각종 사고를 조심하긴 해야 했다.



  차메라는 산 중턱의 마을에서 트래킹을 시작했는데 초반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 길을 막은, 눈사태의 흔적을 발견한 다음부터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평소에는 비포장도로긴 해도 오토바이가 다닐 수 있는 길이었다고 했는데, 며칠 전 70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고 했다. 우리가 영화에서 봤던 히말라야와 똑같은, 온 사방이 새하얗게 빛나는 눈밭이었다. 앞사람이 밟은 자리를 따라 밟지 않으면 발이 무릎까지 빠지는 눈밭에서 체력은 급격하게 떨어졌다. 심지어 나는 체중이 많이 나가다 보니 남들은 안 빠지는 자리를 디뎠는데도 발이 푹푹 빠지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삼보일배 해야 했다.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백두산을 종주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 선두에서 트래킹을 시작했지만, 중간 휴식 지점에 도착할 때는 맨 뒤로 쳐졌다. 트래킹 둘째 날에는 아예 모두를 보내고 니마라는 셰르파와 함께 30분이나 늦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셋째 날에는 최종 목적지인 마낭까지 가는 팀을 떠나보내고 피상에 남는 선택을 해야 할 만큼 지쳐 있었다. 다행히 우여곡절 끝에 고산병 증상을 보인 1명과 발목을 다친 1명을 제외하고 트래킹은 무사히 끝났다.


  사실 한국에 돌아온 다음에도, 제라스를 다니기 전까지만 해도 히말라야 트래킹은 썩 좋은 추억만은 아니었다. 얼떨결에 인생 버킷리스트를 이루긴 했지만, 나름 등산은 자신 있었는데 저질 체력으로 여자인 친구들도 최종 목적지까지 갔다 왔는데 중간에 포기한 모습이 쪽팔렸기 때문이다.


  내 혼자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많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동료들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자 히말라야 트래킹이 다르게 보였다. 내 앞에서 눈에 빠지지 않도록 어딜 디뎌야 하는지 알려주는 친구들이 있었고, 식기와 식재료, 우리의 짐까지 산더미처럼 짐을 짊어지고 뒤를 따르던 쿡팀이 있었다. 우리가 푹 자는 동안 쿡팀은 새벽 6시부터 일어나 밤새 굳은 몸을 풀 수 있도록 뜨거운 보리차를 나눠주었고, 아침을 준비해주었다. 그리고 지쳐 있다 싶으면 다가가 서로가 가진 귤과 육포, 물을 나눠주던 친구들이 있었다. 70년 만의 폭설로 사라졌던 길이 함께 걸으니 길이 생겼다.


  길은 혼자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길을 만드는 방법을 몰랐고, 함께 걷는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대학생 때나, 취업 준비할 때나, 글쓰기 강사와 드라마 작가를 준비하는 지금이나 난 늘 제멋대로였지만 그래도 내 꿈을 지지하고,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는 막막함 속에서 끊임없이 넘어지고, 흔들리면서도 계속 걸어가는 이유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지금 누구와 함께 걷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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