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보다 히말라야
아침 7시 30분. 여름에는 해가 중천에 떠있어 괜찮지만, 가을만 넘어가면 아직은 어둑어둑한, 으슬으슬 춥게도 느껴지는 시간. 초등학생의 등교 시간치고는 이른, 몇몇 선생님들보다도 빠른 등교 시간, 아무도 없는 텅 빈 교실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하는 시간, 내가 등교하는 시간.
내가 등교하는 시간은 어머니께서 할아버지의 약국으로 출근하시는 시간이기도 했다. 약사이신 할아버지의 맏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평생을 할아버지의 약국 일을 도우셨다. 어머니는 집에 있는 시간보다 약국에 있는 시간이 더 길었고, 그런 어머니를 따라 나 또한 약국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으니 약국이 제2의 집이고, 정신적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어머니와 함께 등교했던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강서구 방화동에서 강서구 염창동으로 이사하면서부터 어머니가 출근하실 때 함께 집을 나서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9호선이 뚫려서 염창동에서 방화동까지 순수 지하철 타는 시간만 10분 남짓, 지하철역까지 왔다 갔다 하는 시간을 감안해도 30분이면 오가는 거리지만 내가 초등학생이던 1990년대 후반에는 버스를 타고 1시간 이상이 걸리는 거리였다. 스마트폰은 고사하고 몇몇 어른들이나 전화와 문자만 겨우 되는 소위 ‘벽돌폰’을 쓰던 시절이니 당연히 초등학생에 불과한 내가 핸드폰을 쓸 일은 없었고, 핸드폰도 없이 초딩 혼자 집에 남겨두는 것은 매우 불안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약국 일을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니 어쩔 수 없이 이사는 갔지만, 전학은 가지 않고 학교는 그대로 다니면서 4년을 보냈다. 등교는 전교에서 가장 빨리하고, 집이 아니라 약국으로 하교하는, 별난 학창 시절이었다.
누구에게나 그렇겠지만 유년 시절의 환경은 한 사람의 성격과 가치관을 만드는데 큰 영향을미치기 마련이다. 나의 별난 학창 시절은 별난 성격을 만들었다. 학교와 집 사이의 거리가 꽤 있다 보니 혼자인 시간이 상대적으로 길 수밖에 없었다. 아침에 등교해서도 30분에서 40분을 혼자 멍 때리는 일은 기본이었고, 하교 후 어머니가 집에 데려다 준 다음, 다시 약국으로 가고 나면 또다시 혼자였다. 어쩌다가 학교 근처에서 친구들과 놀려고 해도 나는 집에 가는 시간이 있으니 친구들보다 먼저 나와야 했고, 집 근처의 친구들은 이미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과 친해져 놀이터에 나가도 아는 친구 한 명이 없었다. 어찌어찌 같은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을 사귀긴 했지만, 문제는 1시간의 거리만큼이나 학교 친구와 동네 친구들 사이에서의 유행이 전혀 달랐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방화동(학교)에서는 딱지가 유행한다면 염창동(집)에서는 미니카가 유행한다거나 방화동에서 미니카가 유행하면 염창동에서는 서바이벌이 유행한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9호선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 사는 동네도 다르고, 유행도 다른 상황에서 친구를 사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나는 국민개발 소리를 들을 만큼 심각한 몸치라 어느 동네서나 통하는 축구에서 늘 머릿수를 채우는 역할이었고, 마이너스의 손이라는 표현처럼 손만 대면 미니카고, 로봇이고 망가뜨리는 통에 더더욱이 친구들과 어울릴 기회가 없었다. 어딜 가든 잘 노는 사람이 인기가 많고, 쉽게 친구를 사귀지만 나에게는 이렇다 할 재주가 없었다.
그래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부모님을 따라다니는 시간이 훨씬 많았고, 우리 가족이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 곳은 산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나를 안고, 업고, 소백산을 올랐던 부모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북한산, 문수산, 남한산성, 치악산, 월출산 등 전국 곳곳의 산에 데려가 주셨다. 등산을 가지 않는 주말이면 동네 작은 산에 있는 배드민턴장을 찾았다.
덕분에 나는 친구들과 어울린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심심하다고 느낄 겨를이 거의 없었다. 외로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지만 외롭지 않다고 생각했다. 혼자 밥 먹고, 혼자 미용실을 가고, 혼자 영화를 보는 것에 익숙해졌고, 괜찮다고 생각했다. 대학생 때도 동기들과 시간표를 맞추는 대신 혼자 듣고 싶은 수업을 듣겠다고 사학과,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등 타과를 전전하고, 동기들이 함께 사회봉사 프로그램을 신청할 때 혼자 사회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했었으니까.
외롭지 않다는 것이 나의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2020년에 청계산을 다녀온 직후의 이야기다. 부모님과도 두어번 다녀왔던 청계산은 내 기억 속에서 그리 힘들지 않았던 산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 근교에서는 높은 편이라지만 1000m가 넘는 산들도 수십 번 오르고, 2744m의 백두산 종주까지 해봤으니 청계산쯤이야. 애들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고등학생 때까지는 거의 매달 등산을 갔었지만 대학교 입학 이후 1년에 1,2번 등산을 갈까 말까 할 정도로 산에 거의 오르지 않았다. 대학생 때는 주말마다 MT다 동아리다 바빴고, 졸업 후에는 한동안 취업 준비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입사 후에는 주말, 평일 가리지 않고 일한다고 정신없어서 등산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등산 간 것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등산가는 빈도가 낮아지니 점점 몸도 익숙해져 퇴사 후 시간이 많았는데도 2019년에는 남한산성에 올라, 반 바퀴 돈 것이 전부였을 정도다였. 당연히 몸은 한창 산에 다닐 때보다 한참 무거워져 있었고, 체력은 떨어져 있으니 낮다고 만만하게 본 청계산조차 중간에 몇 번을 쉬어가며 페이스 조절을 해야만 했다.
그 무렵 이직을 준비하던 친구 K를 만났는데 K는 시간 날 때마다 인왕산에 간다고 했다. 특별히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장비나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다 코로나 시국에 그나마 자유롭게 즐길 수 있어서 등산이 좋다고 했다. 자칭 산악인이라고 말할 만큼 등산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뤄왔었던 내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난 정말 등산을 좋아하긴 했을까?
청계산을 오르면서 정말 오랜만에 등산 다운 등산을 하게 된 이유를 생각해보니 ‘사람’ 때문이라는 답이 나왔다. 서로의 관심 분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체험하는 모임인 크리에이터 클럽에서 등산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났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늘 혼자서 뭔가를 알아서 하긴 했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허전함이 있었다. SNS에 나는 혼자 갔다 온 연탄 배달 봉사에 친구들과 같이 참가했다는 동기들의 사진이 올라올 때 괜히 부러워서 사회봉사단 학생팀장에 지원하기도 했었다. ‘함께’ 봉사한다는 기분을 느껴보고 싶어서. 공강 시간이 생겼을 때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대신 일부러 이 사람 저 사람 전화해서 시간을 보내려고 했었다. 시험 기간이어도 오는 전화를 마다하지 않고, 술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잘 마시지도 않으면서 술자리는 빼지 않고 참석했었다.
혼자였던 시간이 길었기 때문일까. 익숙하다고 말하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외로움이 꽤나 사무쳤던 모양이다. 혼자 밥을 먹는 상황이 익숙해서 혼자 잘 먹기도 하지만, 누군가와 밥을 먹을 때면 그 짧은 시간의 침묵조차도 병적으로 싫어해서 무슨 말이든 일단 던지고 보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볼링이 좋아서 볼링동아리에 10년 넘게 나가는 것이 아니라, 볼링동아리 사람들이 좋아 10년 넘게 나가는 것처럼 등산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혼자였던 시간이 충분했기 때문에, 더 이상 혼자 뭘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등산을 가지 않았었다. 누군가 가자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니 그제야 몸이 움직였던 것이다.
확실히 깨달았다. 책상 앞에 앉아 자기와의 싸움을 계속해야 하는 공무원 시험, 회계사 시험 같은 고시 공부를 할 성격이 못 된다는 것을. 그러기엔 난 외로움이 너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