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보다 히말라야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2007년 할아버지도 칠순을 맞이해 약국을 정리하고 은퇴하기로 하셨다. 더 이상 어머니가 할아버지의 약국 일을 도와줄 필요가 없게 되면서 20년을 살았던 강서구를 떠나게 되었다.
이사를 결심하면서 부모님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파트 창문으로 보이는 풍경도, 교통편도, 교육도 아니었다. 집 주변에 걸을 수 있는 작은 산이 있기를 원하셨다. 중학생 때까지 거의 매달 1차례 이상 산에 오를 만큼, 부모님은 등산을 좋아하셨기 때문이다. 등산이라고 표현은 하지만 등산이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작은 산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니 등산보다는 흙길을 걷는 것을 좋아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지만.
고르고 골라 이사 온 곳이 지금 사는 약수역 근처의 아파트다. 앞에는 매봉 근린공원이, 뒤에는 응봉 근린공원이 있어 40분~1시간 정도 산책하기 딱 적당한 코스가 있었고, 맘만 먹으면 서울 남산까지도 걸어갈 수 있는, 그야말로 산책에 최적화된 동네였다.
이사 온 뒤로 아버지는 저녁 일정이 없는 날이면 매일 앞산과 뒷산을 한 바퀴 돌고 오셨고, 때론 어머니와 함께 남산까지 한 바퀴 걷고 오시기도 했다. 그 당시 나는 고등학생이 되면서 수험공부를 핑계로 등산은 고사하고 운동조차 게을리한 채로 몸집이 불어나 있던 터라 거의 따라나서지 않았다. 수험공부도 중요하지만,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닦달에 못 이겨 어쩌다 한 번씩 따라나서는 식이었다.
단순히 몸이 불어 있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부모님의 패턴을 이해하기 힘든 것도 있었다. 부모님은 굳이 남산순환로를 걸어가 점심으로 남산 왕돈까스를 먹고 다시 집까지 걸어오곤 하셨는데, 갈 때는 걸어가더라도 올 때는 지하철을 타고 오거나, 아니면 갈 때는 지하철을 타고 가서 먹고 나서 소화시킬 겸 걸어오는 것도 아닌, 맛있게 먹고 집에 돌아오면 배가 다 꺼지는 패턴이 마치 바위를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시지푸스의 뻘짓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 마음을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어쩌겠는가. 부모님이 가자고 하면 따라나서야지. 수능이 끝난 12월의 어느 날, 크리스마스 즈음해서 부모님께서 수능 공부하느라 고생 많았다며 남산에 가자고 하셨다. 운동도 하고 전망 좋은 곳에서 맥주 한 잔 하자는 말씀에 흔쾌히 따라나섰다.
일반적인 경우 남산 전망대까지 올라가는 방법은 크게 3가지다. 명동 쪽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거나, 남산타워까지 올라가는 순환 버스를 타거나, 순환 버스가 올라가는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거나. 남들이 많이 가는 길보다 우리만의 길을 만들어서 가는 우리 가족이 남산 전망대에 올라가는 방법은 걸어서 가되, 등산로를 택하는 방식이었다. 순환 버스가 올라가는 길에서 왼쪽으로 빠지면 남산 남측 산책로가 나오는데 남측 산책로를 따라가다가 등산로로 빠지면 다른 산들처럼 흙길을 밟으며 남산타워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나도 부모님처럼 아스팔트 길보다 흙길을 걷는 것을 좋아하는 데다 멀리 나가지 않고 등산하는 느낌을 맛볼 수 있어서 좋아하는 길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코스는 아니라 그런지 평소에는 등산로를 따라 오르는 길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는데 그날따라 사람들이 꽤 많았다. 커플들이 많은 것을 보니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데이트 코스로 유명한 남산을 찾은 듯했다. 전망대의 펍에는 자리가 만석일 정도로 사람들이 미어터졌다. 30분 정도를 기다려 겨우 자리를 찾아 앉을 수 있었다.
맥주가 나오고 재수 생활 동안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하나같이 커플들뿐이었다. 심지어 내 앞에 앉아 있는 부모님조차도.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괜히 크리스마스 시즌에 부모님과 같이 나와서 못 볼 꼴을 봤단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이 그럴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곳곳에서 꽁냥꽁냥대는 커플들 틈바구니에서 나만 혼자라고 생각하니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만나는 사람이 없기도 했지만, 재수 생활을 막 마친 탓에 수험생도 아니고, 대학생도 아닌, 어딘가에 소속되지도 않은, 붕 뜻한 상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래저래 외로우면서도, 씁쓸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드는 내가 참 우스웠다.
늘 그런 식이었다. 내 주변에서 파리보다 히말라야가 좋다며 네팔로 떠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염창동에서 1시간 거리의 송화초등학교로 등교하는 사람도 나 혼자였고, 경영학과에서 회계사 시험에 관심이 1도 없던 사람도 나 혼자였고, 사학과, 관광학과 수업을 듣겠다고 기웃거리던 경영학과생도 나 혼자였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으나, 소속되어 있지 않은 사람, 이방인이었기에, 혼자라고 생각했고, 혼자가 익숙하다고, 그렇게 믿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