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보다 히말라야
내 친구들 사이에서 나는 언제나 별종이었다. 경영학과 주제에 CPA 시험에는 1 나노그람도 관심이 없는 대신 사학과나 신방과를 기웃거렸고, 유럽이나 미국 여행이 아니라 네팔로 히말라야 트래킹을 떠났으며, 축구보다 야구를 좋아하고, 10년 넘게 장비를 갖추고 볼링을 쳤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별난 특성들 중 친구들이 가장 신기해하고 한편으로는 짜증내는 것이 당구치는 방법이다.
“아 더럽네, 진짜”
당구를 칠 때 유독 자칭 예술구, 콜럼버스 샷, 친구들 사이에서는 냄새로도 불리는 공식명칭 플루크샷이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자칭 예술구, 친구들 사이에서는 냄새로도 불리는 공식명칭 플루크샷이 자주 나오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물리법칙을 무시한, 말도 안 되는 샷, 전생에 나라를 구한 듯한 운빨로 만든, 일명 ‘뽀록’ 혹은 ‘후루꾸’다.
뽀록, 후루꾸는 요행을 뜻하는 영어 단어의 Fluke의 일본식 발음이다. 문자 그대로 내가 의도하지 않았으나 좋은 결과가 나왔다는 것을 말한다. 당구에서는 주로 초적구가 빗나갔는데 돌고 돌아와서 득점한다거나, 빗나가야 하는 공이 공끼리 부딪치는 쫑이 나서 득점을 할 때 뽀록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야구에서는 아웃 될 법한 공이 불규칙 바운드가 되어 수비수가 놓친다거나 축구에서는 골포스트를 맞고 튕겨 나와야 할 공이 골인한다거나 하는 경우도 모두 뽀록이라고 할 수 있다.
뽀록 샷은 득점 이상의 의미가 있다. 상대방의 멘탈을 흔들기 때문이다. 당연히 공격권이 넘어오거나, 상대방의 점수가 깎여야 정상인데 예상과 빗나가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실력으로는 분명히 내가 이겨야 하는데, 괜히 기분이 나쁘고, 화가 나서 내 샷에 오로지 집중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 친구들 사이에서는 뽀록 샷이 나왔을 때 상대방 약 올리면서 이어갈 수 있어서 뽀록 샷으로 인해 목소리가 높아지는 경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친구들을 표현을 빌리자면 ‘물리법칙을 무시한’, ‘말도 안 되는’ 코스로 득점을 자주 하다 보니 내 친구들 사이에서는 뽀록 샷 = 내 전매특허라는 이미지가 생겼다.
유독 내 차례에 뽀록 샷이 많이 나오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내가 당구를 잘 못 치기 때문이고, 남들보다 세게 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득점할 수 있는 정석 코스, 일명 ‘길’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내 감대로 공을 치곤 하는데 워낙 세게 치다 보니 남들이 1바퀴 돌고 멈출 공이 나는 2바퀴를 돌고 들어간다거나 예측불허의 쫑이 자주 난다거나 하는 식이다. 친구들의 예측과 벗어난, 공을 친 나조차도 어떻게 득점을 했는지 설명할 수 없는 말, 그대로 기가 막힌 샷들이 하도 자주 나오니 이젠 친구들도 ‘그럼 그렇지’하는 식으로 반쯤 포기했다.
뽀록 샷이 터지고 친구들이 뭐라고 할 때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길은 만들어서 치는 거야’라는 말을 자주 한다. 당구야 정석 자체를 모르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치지만 어느 정도 정석을 공부한 바둑도, 볼링도, 스타크래프트에서도 정석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편이다. 승패와 무관하게 결과가 뻔하게 예상되는 정석은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희박한 롹률이지만 뽀록 샷이 성공했을 때의 쾌감은 정석대로 해서 승리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쾌감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다윗이 골리앗을 쓰러뜨린 듯한 카타르시스라고나 할까. 한 번 그 맛에 중독되니 종목을 떠나서 평범한 게임이 재미가 없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정석보다는 뽀록 샷의 성공 확률이 희박하기 때문에 승률 자체는 매우 낮은 편이다. 그렇다고 내가 패배를 즐기는 마조히스트는 아니고 그저 위험을 감수하는 성향이 높은 것이다.
뽀록 샷은 단순히 운이 좋은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위험을 감수해야 얻을 수 있다. 좋게 포장하는 친구는 내가 승부사 기질이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기업 임원까지 올라 명문대-대기업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굳게 믿는, 안전제일주의의 대표주자인 부모님 밑에서 어떻게 나 같은 돌변변이가 나왔는지 참 의아한 일이지만 생각해보면 우연은 아니었다. 부모님께서 직접 ‘정해진 길은 없다’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등산을 통해.
중국의 소설가 루쉰은 희망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대지의 길과 같다고 했다. 본래 대지에는 길이 없었고,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된다는 것이다. 아스팔트로 잘 닦인 도로를 달리고 정해진 노선만 다니는 지하철과 버스를 타는 게 대부분인 도시에서는 뭔소리인가 싶겠지만 산을 오르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뜻을 알게 된다.
강남에서 신촌을 가기 위해서는 보통 교대 방면 2호선을 타고 한 번에 가듯이 모든 산에는 등산로라고 하는 정해진 길이 있다. 하지만 잠실 방면으로 지하철을 탈 수도 있고, 교대에서 3호선을 갈아타고, 을지로 3가에서 환승하는 방법도 있듯이 목적지까지 가는 방법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등산도 마찬가지다. 동쪽에서, 서쪽에서, 남쪽에서 올라갈 수도 있고, 바위를 넘어갈 수도 있고, 둘러서 평탄한 흙길을 걸을 수도 있다.
제법 많은 산을 다녔지만, 그중에서도 북한산만큼 다양한 코스를 겪었던 경우는 없었다. 서울 근처에 있는 산 중에서 높은 편에 속해서인지 가장 많이 올랐던 산이기도 한데 매번 다른 코스로 산을 올랐다. 워낙 오래전의 일이라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정상 부근에서 급격하게 가팔라졌던 백운대 정상을 오르는 코스와 시종일관 밧줄을 붙잡고 암벽등반 하듯이 바위를 기어올랐던 비봉 코스, 경복궁 옆에서 시작해 동네 앞산처럼 제법 평탄했던 길까지 내가 걷는 길마다 북한산은 다른 산처럼 다가왔다.
실제로 북한산국립공원 홈페이지를 들어가면 지하철역 도봉산역에서 출발하는 우이암 코스, 고양시 쪽 송추계곡에서 시작하는 오봉 코스, 효자동에서 시작하는 북한산성 코스와 대남문 코스 등 10여 가지가 넘는 코스들이 소개되어 있다. 전문 산악인들이 자일을 타고 오르는 인수봉 코스까지 포함하면 북한산을 오르는 방법은 정말 여러 가지이다.
코스만 다양한 것이 아니다. 우리 가족의 등산 습관 중 한 가지는 ‘길처럼 보이면 일단 간다.’였는데 많은 등산객이 걷는 길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감을 믿고 일단 그 길을 걷곤 했다. 출발지와 목적지는 같더라도 중간중간의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길을 만날 수 있었다. 때로는 정해진 코스보다 돌아가기도 했고, 때로는 정해진 코스보다 질러가는 지름길인 경우도 있었고, 조금 돌아가더라도 바위를 넘는 것보다 한결 편안하게 갈 수 있었다. 운이 좋을 때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풍경들을 만나는 행운을 만나기도 했다.
정해진 등산로가 아니라 내 감에 의존해서 산을 타는 습관들은 현실에서도 남들이 하지 않는 시도로 이어졌다. 정해진 코스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괜찮다는 사실을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다. 성공 확률이 낮더라도 ‘될 것 같은데?’를 되뇌며 과감하게 당구를 치는 이유다.
당구뿐만이 아니었다. 이동할 때도, 공부할 때도 대체로 새로운 시도를 편에 속했다. 예를 등러 왕십리에서 종로에 갈 일이 있는 경우 지하철 노선도대로라면 2호선 시청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야겠지만 2호선 을지로입구역에 내려서 청계천을 건너가는 식이다. 대학교에서 발표할 때는 수업 시간에 다루지 않은 새로운 사례, 다른 수업에서 들은 이론을 가져와 써먹기도 했다.
매번 정석과는 다른 선택을 반복하다 보니 시험 성적이 좋을 리도 없었고, 대화의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창의적이라는 칭찬을 받기도, 뜬구름 잡는다는 핀잔을 듣기도, 스스로가 아웃사이더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나인 것을. 길은 만들어서 가면 그만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