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보다 히말라야
우리 가족의 등산 철칙은 한 번 오른 산은 무조건 정상까지 찍고 내려온다였다. 설악산이나 지리산, 덕유산처럼 아예 등산을 시작하지 않았던 경우를 제외하면 한반도에서 가장 높다는 백두산 종주까지 포함해서 그동안 다닌 대부분의 산에서 정상을 밟고 내려왔다.
등산을 싫어하는 친구들은 어차피 내려올 산 뭐하러 올라가냐, 사서 개고생 하냐라고 하지만 땀 흘린 상행 끝에 정상에 도착했을 때의 쾌감은 뭐라 표현할 길이 없다. 서울 시내에서는 볼 수 없는 탁 트인 풍경, ‘맛있다’고 느껴지는 공기, 시원한 바람과 사시사철 바뀌는 그림 같은 풍경까지 등산의 매력은 산에 올라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산 정상 위에서 부모님과 인증샷을 찍을 때면 무엇 하나 잘하는 게 없어 주연은커녕, 조연조차 될 수 없던 내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어린 마음에 주인공이 되고 싶어 더 열심히 산에 올랐는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산에서 정상까지 올랐지만, 실패한 산이 몇 있다. 첫 번째로 좌절을 안겨준 산은 원주 치악산이었다. ~악산이라 불리는 산들은 크고 아름답(岳山)기도 하지만 그만큼 험난(惡山)한 편이다. 비슷한 높이의 다른 산에 비해 등산이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난이도가 있는 만큼 만반의 준비가 필요했지만, 평소처럼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산에 올랐으니 정상 근처도 가지 못하고 하산해야 했던 것은 어쩌면 예정된 일이었다.
99년의 4월 초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우리 가족은 봄이 되었으니 당연히 눈이 다 녹았겠지라고 생각했지만, 산의 그림자는 생각보다 짙었다. 서쪽의 응달쪽에는 겨우내 내린 눈이 그대로 얼어붙은 얼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금이야 아이젠 같은 산행 장비가 대중적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아이젠은 전문 산악인들이나 신는 것이었다.(물론 산을 제법 다니긴 했지만 튼튼한 몸뚱아리만 믿고 소위 말하는 정신력으로 산에 올랐던 부모님의 기준이다. 초등학생에 불과했던 나에겐 선택권도, 정보도 없었다.)
아이젠은 고사하고 스틱조차 없던 일반인이 얼음투성이의 바위를 올라 정상을 찍고 다시 얼음 투성이인 바위를 내려오는 일은 자살 행위에 가까웠다. 평범한 산도 아니고 가파르기로 유명한 치악산인데, 얼음까지 그대로 있으니 놀이터의 미끄럼틀을 거꾸로 올라가는 것 마냥 몇 걸음 올라가다 미끄러지고, 몇 걸음 올라가다 미끄러지고를 반복했다.
8부 능선쯤에서 부모님은 하산을 결정하셨다. 정상 가까이 온 만큼 체감 경사가 60도 가까운 롤러코스터처럼 느껴졌는데, 문자 그대로 기어서라도 정상에 올라갈 수는 있는 상황이었지만 하산을 생각하면 답이 없었다. 평범한 산도 올라갈 때보다 하산할 때가 더 위험한 법인데 얼음투성이의 바위 길은 말할 것도 없으니까. 아버지 혼자라면 어떻게든 가능했을지 모르겠으나 유독 하산을 힘들어했던 어머니와 초등학생인 나까지 케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상을 밟지 못하고 하산을 결정했지만 이미 정상 근처까지 꽤나 올라온 터라 내려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 우리 가족에게 구세주가 나타났다.
“도와드릴까요?”
어딘지 모르게 앳된 느낌이 있는, 30대 직장인이라기보단 20대 대학생으로 추정되는 형들 셋이었다. 20년도 더 된 오래된 얘기라 형들이 먼저 도움을 주겠다고 했는지, 부모님이 먼저 요청했는지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부모님 성격상 형들이 먼저 도와주겠냐고 물었던 것 같다.
“그럼 우리 애만 좀 부탁할게요.”
아버지는 나를 그 형들에게 맡기셨고, 어머니를 부축해서 내려오기로 하셨다. 나는 형들과 함께 먼저 하산해서 등산로 초입에서 만나기로 했다. 아니, 함께 하산했다는 말은 틀렸다. 형들 중 한 명이 나를 어깨에 짊어내고 우다다다 달려 내려갔으니까. 음... 그냥 산 아래로 운반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흔들림이 심했지만, 놀이기구를 탄 것 같아 어린 나는 마냥 신났다. 나를 등산로 초입에 내려준 형들은 부모님 잘 기다리라고 인사하며 사라졌고, 나는 잠시 후 내려온 부모님과 상봉할 수 있었다. 집에 가려고 주차장 쪽으로 가는 길에 그 형들이 잔디밭에서 라면을 끓여 먹고 있어서 부모님이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고 헤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생판 처음 보는 사이에 아이를 맡기다니. 맡아주겠다는 사람들이나, 맡아달라는 부모님이나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 신난다고 그 사람들을 쫄래쫄래 따라갔던 나도 정상은 아니고. 핸드폰도 없이 부모님을 기다렸던 것도, 다시 부모님을 무사히 만난 것도 요즘 시대에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그 시절에도 개구리 소년 사건을 비롯해 살벌한 유괴사건들이 툭하면 신문지면을 수놓았으니 우리 가족이 단순히 운이 좋아 착한 사람들을 만났다고 할지 모르겠다. 과연 운이 좋았기 때문일까? 적어도 2022년 지금보다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흔쾌히 힘든 이웃에게 손길을 내밀고, 지친 어린아이에게 어깨를 내어주고, 낯선 이에게 아이를 맡겨도 안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날로그로 대표되는, 세기말의 감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 기억 속 90년대에는 낭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반찬을 나눠 먹던, 놀이터에서 놀다가 친구 집에서 저녁 먹고 들어가는 것이 당연했던,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골목길 같은 낭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