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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Oct 17. 2021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습니다.

이탈리아보다 히말라야

   자석의 N극과 S극은 찰떡같이 붙지만, N극과 N극, S극과 S극끼리 붙이려고 하면 절대 붙지 않는다. 상극(相剋)이다. 상극이란 단어가 음양오행설에서 서로 다른 성향끼리 충돌한다는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같은 성향끼리 충돌하는 자석을 상극이라 할 수 있을까 싶지만, 때론 서로 닮았기 때문에 더욱 싸우는 경우도 많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고집이 센 사람과, 유한 사람이 만났을 때보다 고집이 센 사람들끼리 만났을 때 더 많이 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붕어빵이라는 말처럼 외형적으로나 성격적으로 상당히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 부모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혹은 스스로의 단점을 너무 잘 알기에, 상대방에게서 보이는 단점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때로는 친구들보다도 부모님과, 자녀들과 더 많이 싸운다.


   우리 집이 그랬다. 지금은 관계가 많이 개선되었지만 30살이 되도록 나는 늘 부족한 아들, 못난 아들, 한심한 놈이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대기업 임원까지 지낸, 자수성가한 아버지 인생에서 나는 아들 얘기만 나오면 쪽팔려서 할 얘기가 없게 만드는, 과장을 조금 보태 완벽한 본인의 인생에서 유일한 인생의 오점과도 같은 존재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버지와 항상 싸웠던 것도,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등산을 비롯해서 다양한 취미 생활을 공유하고 있고, 다른 집에 비하면 가족끼리 엄청 많은 시간을 보내는, 화목한 편에 속한다. 다만 아버지나 나나 본인이 생각하는 기준, 선을 넘었을 때 참지 못하고 욱하는 성격이 있기 때문에 한 번씩 크게 부딪혔던 것이다. 주말에 화기애애하게 점심을 먹다가, 여행지의 숙소에서 투닥투닥 장난치다가, 심지어는 집에서 바둑을 두다가 싸운 적도 수두룩했다.


  한라산에 올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재수를 마치고, 성적 발표를 기다리며 대입 전형을 고민하던 중에 재수하느라 고생했으니 오랜만에 부모님과 여행을 가기로 했다. 나는 친구들과 일정이 있어 부모님이 제주도로 떠나시고, 나는 나대로 여수와 부산을 거쳐 제주도에서 합류해서 한라산을 오르기로 했다.


   제주도를 4,5번 찾았지만, 한라산을 오른 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 한라산을 오르려다가 폭우로 인해 등산로 입구에서 입산이 금지되었었기 때문이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언젠가 한 번은 올라야지 했는데 좋은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우리 가족은 성판악에서 출발해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나 백록담까지 오르기로 했다. 몇 차례 겨울 산에서 호되게 당한 이후로 만반의 준비를 마친 덕분일까 생각보다 순조롭게 올랐다. 눈이 엄청 많이 쌓여 발을 잘못 디디면 무릎까지 푹푹 빠졌지만 대신 그만큼 아름다운 눈꽃 구경을 실컷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문제는 진달래밭 대피소를 지난 다음 발생했다. 성판악 – 백록담 코스에서 진달래밭 대피소는 약 7부 능선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정상과 가까워진 만큼 경사도 심해졌고, 눈도 점점 더 많이 쌓여 있었다. 무엇보다도 등산로가 매우 협소했다. 눈이 워낙 많이 온 탓에 등산로를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등산객들이 오가며 발로 다져놓은, 성인이 2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정도의 길만 남아 있을 뿐 양쪽 사이드에는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하루 종일 앉아 공부만 하던 재수 시절을 마친 직후라 지금보다 훨씬 거대한 체격을 자랑하던 나로서는 곤욕이었다. 하산하는 사람을 위해 길을 비켜주려면 남들이 한 발 옮길 때 나는 두 발을 옮겨야 했는데, 두 발을 옮기면 그대로 눈밭에 푹 발이 빠져버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남들이 밟았을 때는 빠지지 않았던 곳을 밟았는데도 내가 밟으면 그대로 빠져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사람들이 내려오지 않더라도 안경에 서린 김 때문에 시야가 제대로 보이지 않아 눈밭에 빠지는 일도 반복되었다. 가뜩이나 운동을 하지 않아 덩치만 컸지 근육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한 번 눈밭에 발이 빠질 때마다 체력이 급격히 소진되었다.


                                        “왜 자꾸 눈으로 들어가?! 똑바로 못 걸어?!”

                                                   “김이 서리면 안경을 벗든가!”


   앞은 보이지 않지, 뭐만 하면 발은 푹푹 빠지지, 가뜩이나 무거운 몸뚱이가 점점 말을 듣지 않는데 아버지는 똑바로 걷지 못한다고 화를 내셨다. 나라고 눈밭에 들어가고 싶을 리가 있나. 사람이 내려오니 비켜줘야 하는데 길이 좁은 것을, 내 몸뚱이가 비대한 것을 어쩌란 말인가. 안경을 벗자니 공익 판정을 받았을 만큼 시력이 나쁜 내가 안경을 벗어봐야 앞이 안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는데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어쩔 수 없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짜증도 몇 번 냈지만, 나중에는 포기했다. 짜증을 낼 체력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산하고 싶지는 않았다. 산을 일단 올랐으면 정상까지 가는 것은 당연했고, 무엇보다도 눈앞에서 백록담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기로 삼보일배를 반복하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하산하자고 하셨다.


                                            “그 따위로 갈 거면 가지 마. 내려가.”


   나왔다. 아버지의 전매특허 ‘그따위로 할 거면 하지 마.’. 차라리 쌍욕을 하고, 혼이 나면 모르겠는데 아버지는 늘 저런 식이었다. 최선을 다하지 않고 있는 모습, 설렁설렁하는 모습을 극도로 싫어하셨고 절대 용서하지 않았다. 문제는 아버지는 행동 자체를 혼내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을 매우 게으른, 형편없는, 한심한 사람, 인생의 패배자처럼 만드는 화법을 사용해 자존감을 엄청 깎아내리셨다는 것이다.


   어차피 더 이상 올라갈 체력도 없는 상태였기에 하산하는 것이 정답이긴 했지만, 화가 솟구쳤다. 힘들어 죽겠는데, 난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 도대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길래 한심한 놈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걸까? 싶었다. 이따위 등산이 뭐라고.


   등산뿐만 아니라 뭐든 대충대충 하는 모습이 자랑할 것도 아니고 나 역시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모든 일은 완벽하게 처리해서 최고의 결과를 내야 한다고 믿는 아버지와 달리 나는 좋아하는 일만 최선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면 결과가 아쉽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적어도 한 번의 실패로 인생이 끝나는 것처럼 화를 내는 아버지의 생각에 동의할 수는 없었다.


   하산하는 내내 우리 가족 모두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지치기도 지쳤고, 말해봐야 싸우기만 할 것 같아 입을 닫았고, 아버지는 화가 난 것처럼 보였지만 포기하신 건지, 화낼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신 건지 말씀이 없었다.


   그렇게 한라산 산행은 최악의 산행 중 하나로 남았고, 이후로 한동안 부모님과 산에 오르지 않았다. 대학교에 들어가 MT다, 축제다, 동아리다 술판을 만끽하는데 정신도 없었지만 부모님과 산에 가봐야 또다시 싸우기만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라산 산행 이후로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등산과 여행을 비롯해 친구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게 도와주신 것과는 별개로 누군가가 실패했다고 해서 나라라도 팔아먹은 것처럼 쥐 잡듯 잡지는 않겠노라고.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하기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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