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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Sep 25. 2022

아버지와 걷겠다던 약속 지킬 수 있을까?

이탈리아보다 히말라야

  한때 문자 그대로 등산에 미쳐있던 우리 가족 중에서 등산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은 단연코 아버지다. 태생 자체도 충청남도 청양의 시골에서 태어나서 매일 같이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셔셔 그런지 아버지는 체력이 좋은 편이었다. 어머니나 나나 전형적인 서울 토박이로 평균 혹은 평균보다 조금 뛰어난 수준에 불과했다. 


  산을 자주 다닐 때는 그야말로 돌도 씹어먹는다던 성장기였기에 그나마 내가 아버지와 비슷한 수준으로 산을 탈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부터는 편식과 폭식, 불규칙한 식습관을 고치지 못해 0.1톤이라는 곰 같은 몸뚱아리가 되면서 다시 한참 뒤처지기 시작했다. 반면 아버지는 가족 중에서 가장 편식도 안 하시고, 적정량만 드시며, 술도 거의 드시지 않는 아주 건강한 생활 패턴을 갖고 계셔서 뛰어난 등산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덕분에 아버지는 설악산 대청봉이라든가, 지리산 노고단이라든가 우리 가족과 오르지 못했던 난코스를 지인들과 다녀오셨다. 당연히 우리 가족이 산에 오를 때마다 늘 선두에는 아버지가 서 있었고, 하산할 때도 아버지의 지휘 아래 움직였다. 아차산이니 인왕산이니 편하게 갈 수 있는 산들도 있지만, 치악산이니, 북한산이니 하는 조심해야 하는 산에서 아버지의 존재만큼 든든한 것도 없었다.


  방학마다, 주말마다 산에 오르다 보니 백두산을 비롯해서 전국 팔도의 웬만한 국립공원과 유명한 산은 거의 다 올라가 봤다. 나름대로 산을 좀 타고나니 해발 300m 남짓되는 산들은 산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산책 정도의 느낌이 들었다. 일례로 해발 260m 정도인 남산을 두고, '걸으러 간다.'라고 하지 등산 간다고 하지 않는 식이다.


  작년 이 맘 때 그 생각이 깨졌다. 2021년 가을, 정말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충북 단양을 찾았다. 코로나나 발생 이후 처음으로 서울을 벗어나 1박 하는 일정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 가족의 여행에는 늘 산이 빠지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무리하지 않고 단양 팔경 중 하나인 옥순봉(해발 283m)/구담봉(338m) 코스 정도만 올라갔다 오기로 했다. 한참을 올라가니 구담봉과 옥순봉으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왔다.



  “옥순봉은 다음에 가자.”


  구담봉에 먼저 올랐다가 다시 내려온 갈림길에서 잠시 고민하던 어머니가 말하셨다. 아버지께서 많이 힘들어하시니 그대로 하산하자고. 사람이 다닌 길인지, 동물이 다닌 길인지 몰라도 뭔가 지나간 흔적만 있으면 일단 길 따라 걷고 보는 우리 가족 성격상 다음 일정도 아니고 체력 문제로 하산을 결정한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나나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의 체력이라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아버지께서는 2020년 11월, 심혈관 수술을 하셨다, 6월부터 계속 가슴께가 아프다고 하시며 병원을 찾았는데 병원에서는 역류성 식도염이라고 판단했다. 약간 의심이 된다고는 말했으나 워낙 건강한 생활 습관-식단 조절, 식사량 조절, 수면량 조절, 비흡연, 절주, 매일 1시간 이상 걷기-을 갖고 계신 아버지였기에 아버지도, 병원에서도 설마 하고 넘어갔던 게 화근이었다.


  약을 먹어도 잠깐 통증이 좋아지는 듯하다가 잠시 뿐 아버지는 계속 통증을 느끼셨다. 8월에 시행한 건강검진에서도 큰 이상이 없다고 하니 미칠 노릇이었다. 마침내 부모님께서는 대학병원을 찾게 되었다. 가을에 접어든 10월의 일이었다. 대학병원 의사는 가족력을 의심했고, 아버지가 큰고모께서 심장 스탠스 시술을 하셨다는 사실을 말하자 의사는 정밀 검사를 권유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 하고 있었는데 결과는 심장 동맥의 6,70%가 막혀 있는 심근경색이었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당할 뻔한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끝났다.


  수술 이후 아버지의 태도가 180도 달라지셨다. 후유증인지는 모르겠으나 옛날과 다르게 매우 예민해지셨다. 평소처럼 남산 산책길에 나섰다가도 조금만 컨디션이 나쁘다 싶으면 되돌아오신다거나 피곤하다 싶으면 22시도 되지 않았는데 잠자리에 드신다. 아주 작은 온도 변화도 견디지 못하셔서 조금만 춥거나, 조금만 더워도 바로 보일러를 조절하고 에어컨을 켜신다. 내가 더위를 못 참아서 선풍기를 끌어안고 살 때 가만히 있으면 안 덥다고 잔소리하던 분이셨는데... 이젠 나보다도 더위를 더 못 참으신다.


  단양 나들이는 코로나 이후 처음 서울을 벗어난 나들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수술 이후 처음 하는 나들이었다. 당연히 옥순봉과 구담봉도 처음 하는 등산이었고. 옛날 같으면 가볍게 올라갔다 왔을 코스에서조차 버거워하시는 모습을 보니 아버지가 새삼 나이 드셨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원래는 아버지 환갑을 맞이해서 2020년에 아버지를 모시고 몽골 트래킹 여행을 다녀올까 생각했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2020년 1월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가 확산되면서 해외여행은 물론 국내 여행조차 마음대로 다닐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몽골 여행은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코로나가 터지지 않아서 아버지와 몽골에 갔더라면? 몽골의 오지에서 갑자기 심근경색이 악화되어 쓰러지셨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코로나 사태도 벌써 3년 째다. 내년이면 아마 정말 마음 놓고 해외여행을 다녀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과연 아버지를 모시고 다녀올 수 있을까. 몽골 트래킹은 무리더라도 더 늦기 전에 한 번 모시고 여행을 다녀오긴 해야 할 텐데 단양 나들이에서의 아버지 컨디션을 보니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다. 예전에 함께 올랐던 산에 비하면 정말 평범하고, 무난하기 짝이 없는 흙길일 뿐인데 이조차도 버거워하실 줄이야. 


  더 늦기 전에 기회가 와야 할 텐데... 아버지를 모시고 걷겠다던 그 약속을 지켜야 할 텐데...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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