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하다 보면 단골 질문이 있다. “얼마나 남았어요?” 대답은 한결같다. 십중팔구 마치 중국집에 전화해서 “언제 배달됩니까?” 물었을 때처럼 “거의 다 왔어요.”라고 한다. 뻔한 대답이지만 거의 다 왔다는 대답만큼 맥이 빠지는 답도 없다. 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포기할까? 조금만 더 가면 될까? 고민에 빠진다.
검단산이 그랬다. 검단산은 지하철 5호선의 종착역인 하남검단산역 근처에 있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다. 해발 700m도 채 되지 않는 낮은 편에 속하지만 유독 힘들고, 지루했던 기억이 있다. 이정표를 찾아볼 수 없어 얼마나 남았는지 가늠되지 않는 상태에서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문자 그대로 빗방울이라 큰 문제는 없었지만, 하산을 생각하니 난감했다. 하산할 때 비가 많이 온다면? 정상을 밟지 못하더라도 안전을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뒤돌아서 내려가야 하는데... 난감했다.
날씨야 신이 아닌 이상 아무도 예측 못하니, 정상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남았느냐 묻는 수밖에 없었다. 거의 다 왔다는 말만 믿고 “거의 다 왔으니까 조금만 서두르자..”라고 몸을 추슬러 앞으로 나아가 봤지만, 정상은 보이지 않으니 맥이 빠졌다. 아마 최소 5, 6번은 그렇게 허탕을 쳤던 것 같다. 천만다행으로 비가 더 쏟아지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비가 쏟아졌다면, 하산하는 길에 사고가 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고속도로에서 남은 km를 확인할 수 있는 이정표는 매우 중요하다. 기름을 언제쯤 채워야 할지, 화장실을 언제쯤 가야 할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에서도 마찬가지다. 검단산에서 내가 겪은 것처럼 비가 쏟아지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를 정확히 확인해야 체력을 분배하고, 등산 스케쥴을 조절할 수 있다. 특히 산에서는 보통 정상을 찍고 내려와야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내가 걸어야 할 거리는 앞으로 정상까지 남은 거리뿐만 아니라 정상에서 하산하는 거리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체력 분배의 문제뿐만은 아니다. 잘 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면 덜 힘들지만 잘 가고 있는 건가?라는 의심이 들면 불안감이 생기고, 불안감은 훨씬 힘들게 만든다. 육체적으로 힘들진 않더라도 “이 길이 언제 끝나지?”하는 답답하고 지루한 마음은 정신적으로 지치게 만든다.
비슷한 이유로 학생들이 공부보다 게임에 열광한다는 분석도 있다. 게임에서는 레벨을 높이기 위해, 원하는 아이템을 받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명확하다. 몇 마리의 몬스터를 죽여야 하는지, 어떤 장소에서, 어떻게 해야 아이템을 받을 수 있는지 등등 가이드라인에 따라 단계를 밟아 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레벨이 오르고, 아이템을 받을 수 있다. 반면 공부는 다르다. 두꺼운 문제집을 던져주고, 무작정 알 수 없는 기호로 가득한 공식이나, 생소한 한자 투성이의 단어들을 외우라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임에 비해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짧으면 2,3분, 길어도 1시간 남짓이면 보상이 주어지는 게임과 달리 공부를 통해 보상을 얻으려면 몇 달, 몇 년의 시간이 필요하다. 잘하고 있는지, 제대로 보상을 받을 수 있는지 계속 흔들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에겐 이정표가 필요하다. 흔들리더라도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계속 걸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힘들더라도 조금 더 노력할지, 방법을 바꿀지, 아니면 쉬었다가 다시 걸을지 방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