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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종운 Sep 13. 2022

아버지처럼 살 수는 있을까?

이탈리아보다 히말라야

    언제부터였을까. 등산이 취미라고, 조금 나아가 자칭 산악인이라고 자신 있게 주장하던 나였지만, 산에 거의 오르지 않게 되었다. 주말마다 볼링 동아리니, MT니 하는 일정으로 바빠졌기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한 달에 1번 이상 가던 산을 분기에 한 번, 반기에 한 번, 1년에 1번 갈까 말까 하게 되었다.


  다시 산에 가야지, 가야지하면서도 예전처럼 몸이 말을 듣지 않아서 차일피일 미루던 중 코로나가 터졌다. 친구들은 고사하고 가족들조차 맘대로 만날 수 없는 상황, 학원도, 헬스장도, PC방도, 카페도, 당구장도 영업 제한에 걸리는 상황,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우연히 진행하던 모임에서 산에 가자는 얘기가 나왔고, 함께 청계산에 다녀왔다. 옛날 생각만 하고 청계산 정도는 앞동산처럼 만만하게 생각했으나 한동안 산을 안 다닌 탓에 체력은 완전 저질이 되어 있었다. 이제 막 등산에 취미를 붙인 이들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을 뿐이다.


  다행히 오랜만에 오른 산은 상쾌했다. 코로나 상황에서 딱히 할 일도 없는지라 이참에 다시 산을 좀 다녀야겠다 싶어서 매달 서울 시내 산에 올랐다. 저질 체력을 감안해 인왕산과 아차산으로 워밍업을 한 후 관악산에 올랐다.


  과천 정부청사 역에서 내려 과천향교 부근에서 시작해서 정상인 연주대를 넘어 북쪽인 낙성대 방향으로 넘어오는 코스를 택했다. 어렸을 적에 부모님과 한 번 오른 적 있는 산인데, 악산치고는 그다지 험하지 않았던 기억이 있어 나름 편하게 생각했으나 오산이었다. 과천향교 쪽에서 연주대 가는 길이 그냥 커피라면, 연주대 정상 부근은 그야말로 이탈리아 장인이 한 방울, 한 방울 정성 들여 로스팅한 최고급 커피랄까. 연주대에서 하산하는 길은 그야말로 바위 투성이어서, 거의 미끄러지듯이 바위에 기대어 기어 내려가야 했다. 이게 길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막막한 마음뿐이었다. 앞에 가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서 몇 번이고 돌아갔을 거다.




  우여곡절 끝에 3시간가량의 산행이 끝나고 낙성대 근처로 내려오니 온 몸은 땀범벅이었고, 바위와 흙길에 뒹군 탓에 바지와 손도 흙투성이가 되었다. 인왕산과 아차산에 비할 수 없는 모처럼의 강행군에 다리도 살짝 풀려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얼른 집에 가서 씻고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저녁 먹고 한숨 돌린 뒤 산 정상에서 찍은 사진을 부모님께 보여드렸다. 미치겠다고, 죽을 거 같다고 관악산이 이렇게 힘든 산이었냐고 호들갑을 떨면서. 서울에서 관악산이 제일 힘든 것 같다고.


  “기억 안 나? 백운대는 저거보다 더 심했어. 아빠가 너 안아서 넘겨줬잖아.”


  아... 어렴풋이 기억이 날 것도 같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초등학교를 들어가기도 전이었던 거 같은데, 부모님과 북한산 백운대에 올랐었다.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어디로 어떻게 해서 올라갔는지 기억이 희미하지만, 선명하게 새겨진 장면이 하나 있다. 백운대 정상 부근에서 아버지가 나를 안아서 반대편 바위로 넘겨주던 장면이다. 길이라고 말하기도 힘든, 바위를 끌어안고 바위와 바위 사이의 작은 틈을 따라 조심스레 게걸음을 걸어야 반대편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자칫 한 발 헛디디면 그대로 절벽 밑 돌투성이로 추락하는 위험한 코스라 초등학생도 아닌 나는 절대 혼자 갈 수 없는 코스였다. 아버지가 나를 번쩍 들어서 넘겨주셨는데, 어린 마음에도 놀이기구 타는 듯한 설렘보다 떨어지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더 컸던 기억이 있다.


사진 출처 : https://blog.daum.net/wwwbudongsan114/961667

  조금 더 나이를 먹어서는 내가 “내가 아버지 입장이 되어서 (나의) 아버지와 똑같은 상황에 처했을 때 내 아이를 번쩍 들어서 안전하게 넘길 수 있을까?”라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이래저래 덜렁대는 성격에 손에 땀이 하도 많이 차는 나라면 차라리 포기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며 오지 않을 미래에 대해서 웃어넘겼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다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니 어림잡아 아버지 나이가 서른서넛 정도지 않았을까 싶은데, 어느새 내가 서른셋이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에...


  나는 아직까지도 자리를 못 잡아서 내 한 몸 건사하기도 벅찬데, 아버지는 지금 내 나이에 자리를 잡고, 가정을 이루고, 부모가 되었다. 심지어 몇 년째 아이를 들처 업고 소백산으로, 태백산으로, 북한산으로 온갖 산에 올랐다. 그 아이의 눈에 늘 앞에 걸어가는 아버지의 등은 참으로 커 보였고, 아버지는 뭐든 해결해줄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였다.


  어느 순간부터였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부터 진로 문제로, 평소 태도 문제로 참 아버지와 지겹도록 다퉜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거다. 고등학생이니 수험 공부를 해야 한다는 핑계로 점차 가족끼리 놀러 가는 시간이 줄었고, 산에 가는 시간도 줄었다. 이십 대 초반에 함께 간 한라산이 마지막 등산이 아닌가 싶다.


  한라산에서 지독하게 아버지와 싸우면서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라는 말을 또다시 내뱉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내가 아버지처럼 살 수나 있을까? 싶다. 평일에는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거의 매 주말 가족과 시간을 보내셨던 분, 위험한 상황에서 어김없이 가장 먼저 앞에 나섰던 분, 부족한 것 없이 원하는 공부 마음껏 하고, 책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신 분. 아버지는 나와는 너무도 다른 사람이었다.


  어쩌면,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는 말은 아버지처럼은 살 수 없는 나 자신을 위한 변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직 내가 철이 덜 들어서, 내 한 몸의 안락함과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서, 누군가를 책임지고 싶지 않아서, 그냥 혼자가 편해서, 신경 쓰는 게 귀찮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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