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포기러지만 글쓰기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빅터 프랭클 박사는 삶의 의미가 중요하다고 했지만 처음에는 삶의 의미가 도대체 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소에 ‘의미가 있다.’라는 말도 참 많이 쓰고, ‘무슨 의미가 있냐’라는 말도 많이 쓰지만 막상 누군가에게 ‘당신 삶의 의미는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면 미친놈 쳐다보듯 하지 않을까. 뭐랄까. 마치 ‘도를 아십니까?’ 같은 사이비 종교 같은 느낌이랄까. 최소한 선뜻 답하긴 어려운 사람들이 많고, 아예 고민조차 해본 적이 없는 사람도 있을 거다.
나 역시 그랬다. 의미라는 단어를 곧잘 쓰면서도 의미가 정확히 뭔지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단어의 뜻? 정도라고 생각했을 뿐. 의미를 뜻이라고 생각하니 ‘의미가 무슨 뜻이야?’라는 문장은 ‘뜻이 무슨 뜻이야?’ 같은 말장난처럼 들렸다.
굳이 삶의 의미를 정의하자면 ‘좋아하는 일을 한다.’ 혹은 ‘즐길 수 있는 삶’ 정도가 떠올랐다. 박지성이니 손흥민이니 김연아 같은 스포츠 스타들을 보면 좋아하니까, 즐거우니까 고통스러운 순간들도 참고 견뎌내지 않았나. 그래서 진로를 결정할 때도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믿었고, 좋아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했다.
문제는 의미 = 좋아하는 일(or 즐긴다)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이야기가 설명이 되지 않는다는 거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아우슈비츠에서의 삶을 즐기거나 좋아할 리가 없지 않나. 마조히스트라면 모를까.
청년도배사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대학교 전공을 살려 사회복지사로 일하던 배윤슬 작가는 나름 안정적인 사회복지사 일을 그만두고 낯설기 그지없는 도배 일에 뛰어들었다. 서울 소재 명문대를 졸업한 젊은 여성이 도배사라니. 말만 들어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도대체 왜?
배윤슬 작가는 도배를 선택한 이유가 잘할 수 있어서도, 좋아해서도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할 수 없는 일’을 피하다 보니 선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회복지사로 일할 당시 그녀가 현장에서 만나는 복지 사업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어르신들의 간절함과 필요성은 정부에서 정한 사업 기준과 비례하지 않았다고 한다. 절박하게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보다 가볍게 신청한 사람들이 선정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배윤슬 작가의 마음은 불편했다. 선정 기준이 불합리하다고 느끼면서도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유달리 누군가의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일을 꺼려했던 배윤슬 작가였기에 사회복지사 일을 계속할 수는 없었다.
새롭게 일을 선택하면서 그녀는 최악의 상황까지 그려가며 고민했다고 한다. 이를테면 직접 소비자를 응대하는데 본인의 기준과 조직의 기준이 다른 상황, 본인의 실수나 잘못이 상대방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일 등을 제외하고 남은 것이 기술직이었다. 사무직에 비해 기술직은 체력 부담이 크다는 점 등까지 고려하고 도배를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얘기다. 철부지 꼬꼬마도 아니고 어떻게 좋아하는 일만 하면서 살 수 있을까. 아니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만든다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다. 좋아하는 일만 의미 있는 일이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무의미한 일들을 하고 있단 말인가. 물론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서 힘들다고, 불행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지만, 좋아하지 않는 일이지만 그 안에서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지 않은가.
‘의미 =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는 건 알겠는데 그래서 도대체 의미가 뭘까? 한참 고민하던 중 의미의 정의에 대해 소개한 최인철 교수님의 굿라이프라는 책의 구절이 떠올랐다. 최인철 교수님에 따르면 의미는 크게 4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고 한다.
첫 번째 의미는 중요성이다. 누군가는 무의미하다고 할지라도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면 사람들은 얼마든지 의미 있다고 느낀다. 두 번째 의미는 필요성이다. 역시 제삼자가 무의미하다, 쓸모없다고 말하더라도 내가 지금 하는 행동들이 누군가에게 쓸모 있다고 느낀다면 사람들은 의미 있다고 느낀다. 세 번째 의미는 이해다. 사람들은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들, 혹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왜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 무의미하다고 느낀다. 반대로 말하면 왜 해야 하는지 알 수 있다면 의미 있다고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네 번째 의미는 정체성이다. 내가 지금 하는 일들이 나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 사람들은 의미를 경험한다.
중요성과 필요성, 이해와 정체성... 어느 정도 알 것도 같으면서 뭐라고 딱 집어서 명쾌하게 이해되는 느낌은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전을 뒤져봤다. ‘말이나 글의 뜻, 행위나 현상이 지닌 뜻, 사물이나 현상의 가치’이라는 설명은 이미 기존에 알고 있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 한자가 눈에 들어왔다. 의미에서 뜻 의(意) 자를 쓴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미 자에 맛 미(味) 자를 쓰고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미각(味覺)할 때 미?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맛이라는 단어를 음식에만 쓰진 않는다. ‘죽을 맛이네.’, ‘살 맛 난다.’, ‘맛이 갔다’, ‘병맛’처럼 음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상황에서도 종종 맛이라고 쓰기도 한다. 의미와 맛이 비슷한 의미라고 한다면 최인철 교수가 얘기한 4가지 의미를 음식에 비유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중요성은 내가 맛있다고 생각하는 음식, 필요성은 취향과 상관없이 건강을 위해 먹어야 하는 음식, 이해는 체질/알레르기처럼 먹었을 때 이상이 생길 수도 있는 음식 그리고 정체성은 지리, 문화 등의 이유로 익숙한 음식이라고 대입해 보니 한결 명확하게 이해가 되었다. 식사하는 패턴을 보면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호불호가 확고한 사람이 있고, 특별히 가리는 음식 없이 그때그때 식사를 즐기는 사람이 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건강을 위해서는 싫어하더라도 먹어야 하는 음식이 있고, 좋아하더라도 알레르기 때문에 먹어서는 안 되는 음식도 있다. 또 바닷가에 살아서 해산물이 익숙하다거나 남쪽 지방에 살아서 여러 가지 반찬, 간이 강한 음식을 즐길 수도 있고, 자영업,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의 영향으로 배달 음식이나 패스트푸드에 익숙할 수도 있다. 그 모든 음식들 중 의미 없는 음식은 없다.
물론 맛있는 음식이 더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맛이라는 것 자체가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이다. 누군가에게는 맛있어도 누군가에게는 맛이 없을 수도 있다. 게다가 특정 음식을 선호하지 않는, 맛에 별로 민감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맛과 무관하지만 익숙한 음식, 건강을 위한 음식 등도 얼마든지 의미가 있는 식사가 될 수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싫어하는 음식, 알레르기가 있는 음식을 계속 먹어야 한다면 무의미한 식사일 거고.
산다는 것도 비슷하지 않을까. 좋아하는 일을 해야만 의미 있다는 생각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착각은 아니었을까. 좋아하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을 업으로 삼았다면 당연히 의미가 있겠지만 누군가는 업으로 삼을 만큼 좋아하는 일이 없을 수도 있다.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하더라도 그 사람의 일이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거다. 당장 생활비를 내야 하고, 수술비, 등록금을 마련해야 하는데 그보다 큰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또 알레르기가 있는 음식을 먹으면 안 되듯 내가 버틸 수 없는 일이라면 아무리 높은 연봉, 좋은 복지가 보장되더라도 의미 있다고 할 수 없다. 특별한 취향도, 알레르기 같은 이슈가 없이 익숙한 일을 하는 것도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의미 있을 수 있다. 그에게는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이제야 확실히 알았다. 나는 글을 쓸 수밖에 없었고, 써야만 하는 사람이다.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글쓰기는 가장 익숙한 일이기도 하고, 나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나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