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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피자 Jul 26. 2020

다 포기하고 싶은 날

가진 걸 즐겨, 카르페 디엠!

   


마음 일렁일 때 서점에 간다.

서점에서 나는 꿀벌이 된다.


 나는 꿀벌처럼 줄무늬 엉덩이를 치켜들어 이곳저곳 인문사회, 경제경영, 여행, 역사, 심리학 코너를 훑어 내려갔다. 앙증맞은 더듬이로 책을 짚어보고, 꿀 따듯 야금야금 책 한 모금 넘겼다. 비로소 현실의 우울감을 떨쳐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세계와 접속하고 있었다.    

  

제목이 훅 치고 들어오는 책. 디자인이 예뻐서 손이 저절로 가는 책, 눈으로 쓸어보다가 한 줄 메시지에 꽂히는 책은 나에게 작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딱히 무슨 책을 읽겠다는 것도 없이 그냥 책들 사이를 슬슬 걸어 다녔다.     




무심결에 간 그 코너

곁눈질로 본 그 사람


그러다 툭, 평소라면 절대 관심도 두지 않을 코너에 발이 멈춰 섰다. 총천연색 컬러판 ‘임신 백과’, ‘엄마라면 꼭 알아야 할 101가지’ 앙증맞은 아기들이 표지에서 날 봐달라고 눈망울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저밋한 가슴으로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바라보게 되었다.      


그때 허리를 짚고 임산부가 걸어왔다. 이 책 저 책 들춰보며 고민하고 있었다. 곁눈질로 살짝 본 그녀, 임산부는 화장기 하나 없이 대충 질끈 묶은 머리, 귀밑머리가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대충 봐도 곧 아이가 나올 것처럼 배가 불러서 숨쉬기 힘겨워 보였다.      


그 모든 것이 온통 부러웠다. 저 뱃속 아기는 심장도 잘 뛰고 있겠지?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보는 마음,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부러움이 이런 건가? 이러지 말자고 온 서점인데?




임산부를 부러워 할 시간에 내가 가진 것을 최대한 즐겨!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다. ‘카르페 디엠’ 지금을 즐겨, 내가 즐길 수 있는 게 뭘까?     

      

카르페 디엠! 지금을 즐겨    

     



출처 pixabay


내가 가진 자유를 소.맥.하기 : 주당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회사에서 알아주는 주당파였다. 초기 임신을 했을 때 최대 걱정은 바로 술이었다. 싸르르 넘어가는 맥주, 10달 동안 맥주를 못 마신다니. 아니 그럼 한 여름밤 에어컨으로만 열대야를 이겨야 한단 말이야?      


보글보글 맥주 거품을 입술 위 인중에 묻혀 쭉 들이키는 그 재미. 열대야는 이 맛이지!라고 말하던 나다. 임신하는 동안 술을 못 마신다는 건 건전한 고통이었다. (실제로는 더 길다. 임신 후에도 모유수유가 끝나는 날까지 맥주는 절대로 안된다. 임신 개월 수 + 모유수유 개월 수 합해서 금주 기간이다)     


소주엔 걸쭉한 탕이다. 막걸리엔 꾸덕한 부침개고, 고량주엔 들큼한 깐풍기다. 와인은 미듐 레어. 아 내 사랑들이여. 친구들과 술 약속을 잡고, 부어라 마셔라(클리셰) 내가 가진 자유를 즐겼다. 나는 이 모든 알콜릭을 여전히 즐길 수 있다. 왜? 나는 임산부가 아니니까.   

   

소주와 맥주의 환상 비율로 소.맥.을 하면 이건 임산부는 절대 x 100 할 수 없는 나만의 자유로움이다. 카르페디엠!           



출처 pixabay



혈관에 쌉싸름 카페인 수.혈.하기 ; 커피 애호가     


또 나는 몹쓸 카페인 신봉자였다. 눈뜨면 한 잔, 일할 때 한잔, 이야기 나눌 때 또 한잔 오후에 쉴 때 한잔, 글 안 풀릴 때 한잔, 집에 가서 저녁 먹고 또 한잔, 책 읽을 땐 필수로 한잔 하루에 대여섯 잔 이상은 기본이었다.


신중히 내려먹는 핸드드립 커피, 원터치 쉽게 내려먹는 캡슐 커피, 뜨거운 물에 우려먹는 스틱 커피, 간편한 팩 핸드드립 커피, 이도 저도 없을 땐 인스턴트 봉지커피까지, 몸에 카페인 혈관이 흐르나 싶을 정도로 커피 애호가였다.


임산부는 커피를 마시지 못하지. 암! 나는 카페인 최대로 올려주는 달콤 쌉싸름한 커피를 앉은자리에서 두 잔 리필할 수도 있다고요. 카르페디엠!     

     


출처 pixabay



격한 운동으로 속.세. 털기 ; 등산가     


몸을 격렬하게 움직여가며 운동하기. 이것도 임산부가 할 수 없는 것이다. 남편과 함께 등산을 했다. 돌부리 차곡차곡 밟아가며 배 당기고 허벅지 당겨도 나는 가뿐하게 산을 오를 수 있었다. 오르기 싫어 엉덩이 빼는 나를 남편은 먹을 걸로 구슬려 가며 기어이 오르게 했다.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그야말로 신선놀음이었다. 작은 거미줄 도로, 작은 성낭 갑 도시를 내려다보는 여유. 개미만 한 우리 집이 보였다. 저 안에서 이불 동굴로 만들어 놓고 얼마나 울었던가? 뭐하러 그랬던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그곳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며, 가지지 못한 것에 울고불고할 이유가 뭐지?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면 결국 이렇게 맑은 자연의 소리와 숲의 기운에 웃고 마는 것을, 카르페디엠!               




있는 그대로의 일탈

가진 그대로의 일상


알코올과 커피와 자연은 있는 그대로의 나에게 살아가는 재미를 주었다. 이 외에도 불규칙한 취침시간, 거리낌 없는 전자파, 맛있는 불량식품. 내가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들. 기다림을 내려놓고 그냥 보통 사람으로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즐기며 살기로 했다.      

    

생각해봐. 모든 행복을 다 가진 사람은 없어. 지갑의 자유에는 궁핍함이 따라붙고, 무자식에는 상팔자가 주어지지. 생각하기 나름인 거야. 다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내 인생은 내가 중심이야. 생각을 비틀어.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보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없는데, 없다고 속상해 본들 바뀌는 게 없다.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가진 것을 즐기며 살자. 내가 가지지 못한 것보단 내가 지금 즐길 수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춰 살자. 언젠가 다시 나에게도 기회가 올 거라고 믿으니까.     




매달 한 줄 행진

매번 두 줄 상상


즐거우려고 노력하고 살았다. 그리고 매달 임신테스트기를 했다. 결과는 ‘한 줄’, 그다음 달도 ‘한 줄’, 또 그다음 달도 ‘한 줄’ 뿐이었다. 꿈에서 ‘두 줄’을 보고 아침에 일어나 임신테스트기를 하면 너무나도 선명한 한 줄이었다.   

   


얼마나 두 줄이 보고 싶었는지. 어렸을 때 매직아이를 해본 사람은 안다. 두 눈에 살짝 초점을 풀고 눈을 모으면? 안보이던 물체가 갑자기 두 개로 보인다. 게다가 입체모양으로 확 튀어나와 보인다. 상상하지 마시길, 두 줄을 보고 싶은 마음이 그만큼이나 쨍했다. 하지만 정신 차려보면 영락없이 한 줄이었다.      



결심했다. 그래 의학의 도움을 좀 받자. 나는 말없이 병원으로 쭈뼛쭈뼛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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