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사소의 곁 11화

양보하자고 할 거 였으면

끝까지 상종했어야 했다.

by FONDOF

집 앞 공원 내 모래 놀이터






아이가 17개월쯤 됐을 때의 일이다.


전 날 무리한 일정이기도 했고 날도 제법 더워져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공원으로 가벼운 나들이를 나갔다.

5월 말의 태양이 제법 뜨거웠다.

모래를 보자마자 태은이는 유아차에서 내려달라며

팔을 뻗고 엉덩이를 들썩이며 난리다.


얼마 전 친정 엄마랑 코스트코에 갔다가 산 모래놀이 버켓세트,

워낙 커서 구성품들 중 작은 버켓과 과 작은 삽, 갈퀴만 따로 빼서

지퍼락에 넣어 차에 넣고 다녔다.

놀라며 쥐어주니 모래를 푸고 땅을 긁으며 신나게 잘 논다.


그러던 중 분홍 공주원피스에 레이스 타이즈, 반짝이는 공주구두까지 신은

세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그 뒤로 힘에 부친 듯, 귀찮은 듯 느릿느릿 할머니가 등장하신다.


아이는 잠깐 내 눈치를 살피더니

대뜸 모종삽을 집어 들고 모래놀이를 시작한다.

태은이가 누나에게 달려들며 뺏으려 하니

상황을 보신 할머니가 손녀에게 “아기 거야~” 하시고,

나도 “누나랑 같이 놀자 태은아, 같이 갖고 놀면 더 재미있어~” 했다.

여자아이가 쭈그려 앉은 채 눈만 빼꼼 들어 분위기를 읽더니

어른들을 올려다보며 “같이~ 같이이~~” 한다.

그 모습이 귀여워 싱긋 웃어주었다.

태은이는 누나의 분홍신발에 박힌

커다란 분홍플라스틱보석을 가리키며 뭐라 뭐라 감탄한다.

“와아 누나 신발 정말 예쁘다 그렇지?”


이내 모래놀이 도구는 던져버리고

미끄럼으로 달려가 뒹굴며 노는 태은이에게 여자아이가 다시 다가와

“모얘뇨이-” 하며 한 손에 챙겨 온 태은이의 버켓에 모래를 담았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태은이가 버켓을 들어 올리자

“어머 얘 좀 봐, 지꺼라고 콱 잡는다?”

신통해하시는 듯, 기가 찬 듯 경계가 모호한 한 마디.


그때 쿨럭, 쿨럭쿨럭 하며

가래 끓는 기침 소리가 연달아 난다.

여자아이는 대여섯 번 기침을 하느라 입을 막았던 손으로

다시 태은이의 버켓과 삽을 집어 든다.

나는 순간 아차 싶었다.


“주아야~ 인제 고만 가자!” 하시는 할머니,

쟤가 아침도 안 먹고 저런다며, 하유 누굴 닮아 저러나 모르겠다시며

날 보며 하소연하듯 얘기하신다.

뒷짐 진 채 그래도 손녀딸이 이뻐죽겠다는 눈을 하시고는

배를 쑤욱 내밀고 연신 가자, 고만 가자 소리만 하신다.


나는 태은이를 좀 더 놀리고 싶었지만 왠지 모를 싸한 느낌에

자리를 뜨는 게 낫겠다 싶어졌다.

낮잠 잘 시간은 한참 남았지만 누군가 들으라는 듯

“태은이도 이제 낮잠 자러 가야지~” 했다.


“시여!”

아이는 뒤도 안 돌아보고 모래놀이에 집중한 채 역정처럼 한 마디 던진다.

“저 봐라 저 엄마 온다. 엄마 차 저-어 온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과일트럭에 틀어놓은 테이프처럼 건조하다.


“가 인제- 아가 거 줘야지” 하시면

“아니야! 내 거야아!” 아이의 목소리는 점점 커진다.


난감해진 나는 우선 태은이부터 주섬주섬 유아차에 다시 앉히고

괜히 가방을 이렇게 저렇게 매만지며 기다렸다.

그런 내 눈치를 몇 번 보더니 할머니가

“주아 거도 사줄게! 가자! 새 거 사러 가자!" 하시고,

아이는 "아니야아! 주아 거야!" 신경질적으로 되받아친다.

여전히 할머니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등 돌려 쭈그려 앉은 채

모래놀이 도구들을 제 앞으로 악착같이 모아놓고.


내가 다가가서

“이모 이제 가야 하니까 이거 가져갈게~” 하며 챙기려 하니

“안돼! 내 거야!” 하며 냉큼 빼앗는다.

플라스틱 장난감이 스쳐간 손끝이 얼얼하다.



“아.. 난감하네요” 한숨처럼 내뱉는데

“어째.. 그냥 하나 새로 사실래요?" 하는 할머니.


나는 잠깐 멍했다.

'뭐야 지금 이게 무슨 말이지?'

잘못 들었나 하는데

"아유 얘가 한 번 땡깡 피우믄 끝이야~ 난 못 당해~"

본인도 민망한지 나는 이 쪽에 서있는데 저 쪽만 보시며

애꿎은 두 눈만 수없이 껌벅껌벅.

그러다 대뜸 묘수라도 떠오른 듯

자기가 돈 줄 테니 새로 사면 안 되겠냐 했다.


순간 나는 전의를 상실하고

더 이상 말을 섞기 싫은 마음,

얼른 이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

저 장난감에 아이의 세균이 다 묻었을 거 같은 불편함 등에

“됐어요 그냥 가지세요” 해버렸다.


“아.. 아니 그래두 애기껀데..이거 뭐 얼마쯤 하나? 이천 원? 삼천 원? 내 지갑이 저어기 있어서.."

말만 할 뿐, 한 발짝도 움직일 척도 하지 않는 할머니에게

상종도 하기 싫다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하며

유아차를 홱 돌려 빠르게 놀이터를 빠져나갔다.

그리고 이 짧은 시간 일어난 황당한 일을 잊자는 마음으로

수돗가로 가서 가방 속에서 휴대용 비누를 꺼내

태은이 손과 발을 박박 닦아주었다.


차를 빼고 나오는데 온갖 생각들이 머리를 채운다.

'할머니는 왜 애를 그렇게 키우세요? 떼쓴다고 다 들어주나요?'

'땡깡 피워도 어쩔 수 없지, 그걸 왜 저보고 새로 사래요?'

'안되는 건 안되는 거라고 가르쳐주셔야죠.'

해버릴 걸 그랬나

그래버렸어야 했나


혼자 씩씩대며

찝찝하게 마무리된 사건을 마음에 들게 재구성하고 있었다.


'멋대로 자기 거라고 해버리는 아이야 뭐, 아이니까 그렇다 쳐도

그렇게 애가 떼쓴다고 다 들어주니 떼쟁이가 되지.

이러니 좋은 마음으로 양보하고 같이 놀라고 얘기한 사람만 바보 되는 거잖아.

아니 태은이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해,

엄마가 양보하래서 양보했더니 결론은 뺏긴 꼴이네.'




아차..

..그러네




태은이한테 양보하자고 한 이상,

내가 거기서 그렇게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내가 "됐어요, 가지세요." 해버려선 안 될 일이었네..


누나가 뺏어갔든,

할머니가 안 돌려줬든,

엄마가 줘버렸든

태은이에게 장난감은 돌아오지 않았다.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나도 결국

이 부당함에 동조해 버린 꼴이 되어버렸다.



심란한 마음으로 운전을 하는데

저 앞에 인도로 그들이 보였다.

할아버지까지 합류해서 셋,

공원을 나와 집으로 가는 모양이다.



뒷짐 진 할아버지의 손에

태은이의 파란 모래놀이 버켓이 달랑달랑

달랑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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