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서 배운다, 늘.
2025년 11월, 45개월
누군가
"어떻게 아직 기관에 다니지 않는 45개월 남자아이와의 일상이 매일같이 즐겁고 행복할 수 있는지?"
라고 물어온다면 나는 주저 없이 답할 것이다,
"요일마다 함께하는 육아동지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매주 월요일은 트니트니를 통해 알게 된 친구들과 함께 하는 날이다.
우리는 이들을 [트니핑]이라 부르기로 한다.
규민이와 규비의 엄마 현아,
연우의 엄마 경희,
채아의 엄마 아름이,
그리고 유하의 엄마 혜미.
나와 태은이까지 전부 모이면 왁자지껄 11명이 된다.
또 나에게는 인생의 반이 넘는 시간을 함께 해온 좋은 동생이 있는데
매주 금요일은 그녀와 그녀의 딸과 만나 공동육아를 하는 날이다.
나보다 여섯 살이 어리지만 동생이라기보다 인생의 동반자 같은 이름, 동희와
동희의 딸 아윤이는 태은이와 같은 22년생 친구다.
이들과 함께라면 평소 엄두도 못 내던 스케줄이 가능해진다.
수목원, 생태공원, 숲 속 놀이터, 각종 박물관과 체험 전시 등
아이와 함께 가보고 싶은 곳은 전부 이들과 다 같이 도장 깨기를 하는,
벌써 1년 하고도 수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쌓인 추억만도 셀 수 없이 늘었다.
나와 태은이의 알상에 주요 인물로 자리 잡은 얼굴들 덕분에
우리의 하루하루는 지루할 틈 없이 새롭고 활기찰 수 있다.
단풍이 절정을 향해 물들어가는 11월의 어느 날,
동희와 여행 같은 하루를 보내고자
우리 아파트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하고 기다려온 날이었다.
그러다 자연스레 트니핑 친구인 혜미가 함께 하게 되었고
평소 The more the merrier! 가 인생의 모토인 나는
더없이 설레는 마음으로 이 날을 시작했다.
나의 "이쪽 세계 친구"가 나의 "저쪽 세계 친구"를 만나
"우리 모두 친구"가 되는 건,
나에게 있어 최고의 사건이다.
그렇게 세계관이 대통합을 이루는 날,
35개월 아윤이와 40개월 유하는 한눈에 친구가 되었고
동희와 혜미도 단번에 자연스러운 공기로 어우러졌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너무 행복한 일!
우리는 공원에서 만나
아이들은 킥보드와 자전거를 타며 놀고
엄마들은 정자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삶은 계란과 소시지 등을 나누며 소소한 가을 피크닉을 즐겼다.
흥분한 아이들은 놀이터에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놀다가도
유하야! 나랑 미끄럼 타자!
응 그래 좋아!
태은아! 이제 그네 타자!
그으래!
아윤아 이리 와!
목이 마르다며 엄마들이 있는 정자로 토다다 달려와 물을 벌컥벌컥 마시거나
배가 고프다며 빵이며 계란을 입 안 가득 욱여넣고 우물거린다.
"발에 공기가 좀 통했으면 좋겠어!"라고 야무지게 말하는 35개월 아윤이도
양말을 벗고 자유로운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스트링 치즈를 얌냠 먹는다.
공룡을 좋아하는 유하,
뼈만 봐도 안킬로사우르스인지 스테고사우르스인지 단박에 구분하는 공룡마니아,
빨간 공룡인형을 한쪽 품에 안고 총총 뛰어다니는 모습이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태은이 보다 4개월 뒤에 태어났지만 키는 8cm가 더 큰 친구,
하얗고 뽀얀 피부에 웃는 얼굴은 상대를 무장해제 시켜버리는 유하.
호기심이 많고 상상력이 풍부해서 가끔 아니 자주,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하거나 가슴 철렁한 뭉클함도 안겨주는 아윤이는
이제 두 번째 타보는 킥보드와 처음 타보는 자전거에 신이 났다.
예쁜 목소리로 "이모, 사랑해요오" 하며 품에 폭 안길 때마다
이모들은 바보빔을 맞은 듯 쓰러져버리는 것.
35개월 아윤이와 40개월 유하, 45개월 태은이
모두 4살 친구들이다.
이 셋이 함께 뛰어노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가득 따뜻한 뭔가가 찰랑이며 차오르는 가을날이었다.
다음 날,
게스트하우스 체크아웃을 하고
다 같이 우리 집으로 올라와
아이들에게 멸치치즈김밥을 만들어 먹이고
엄마들도 샤워 및 커피 타임을 가졌다.
참으로 평화로운 오후의 풍경이었다.
햇살이 들어오는 거실 창 앞에 앉은 동희와 그런 엄마의 무릎에 앉은 아윤이,
모녀는 벌써 몇 권째 함께 책을 읽고 있다.
태은이랑 유하는 놀이방에서
작은 핸드폰 하나로 페파피그 영상을 보고 있었다.
나는 혜미와 식탁에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며
나갈 준비를 하려던 차였다.
그런데 태은이가 갑자기 울면서 방에서 뛰쳐나왔다.
속상한 울음이었다.
그냥 울음이라기보다, 서러운 울음.
너무너무 속이 상해서 우는 울음.
혜미는 대뜸 일어나
"유하 왜 그래? 너 태은이한테 무슨 짓 했어?"
하며 유하가 있는 놀이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태은이를 향해 두 팔을 뻗어 보였다.
태은이는 그 자리에 서서 우느라 움직이지 않는다.
커다란 눈물방울이 빨개진 두 뺨을 타고 흐른다.
"엄마한테 와, 태은아. 무슨 일인지 말해줘."
태은이는 왼쪽 팔을 등 뒤로 갖다 대더니
손이 닿지 않는 지점을 가리키며,
"아, 따가웠어."라고 했다.
"따가워? 어떻게 따가운데? 옷 안에 태그가 있어?"
"아니이. 그게 아니고! 아파아!"
"뭔데 그럼? 어디가 아파?"
"아, 유하가 깨물었어어."
안 그래도 아프고 서러운데 왜 엄마까지 내 말을 못 알아듣냐는 듯
답답하고 원망 섞인 말투,
끝내 깨물렸다는 짧은 문장을 내뱉으며
태은이의 목소리가 누가 볼륨을 높인 듯 커졌다.
나는 깜짝 놀라 울고 있는 아이의 연두색 상의를 들어 올렸다.
아이를 돌려 등을 살펴보니
목 아래, 척추뼈 왼쪽 지점에
엄지손톱만 한 빨갛게 부풀어 오른 물린 자국이 보였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 마음이 꼭 생고기 덩어리 같았다.
그 마음을 뭉툭한 칼로 마구마구,
억지로 찢어놓는 것 같았다.
놀이방 안에서 혜미는 이 사태를 파악하고는
바로 유하를 무섭게 훈육하기 시작했고,
태은이는 서운함에 멎지 않는지
두 눈을 몇 번 질끈 감았다 떴다 하며
닭똥 같은 눈물방울을 떨궜다.
"아이고, 깨물렸구나. 아팠겠네, 엄마가 호 해줄게."
아이의 등에 입술을 가만히 갖다 대고 토닥토닥해주었다.
만화에서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힘이 나와서
아이 등의 상처를 흔적도 없이 없애주면 얼마나 좋을까.
태은이는 이내 진정하고는
사과가 먹고 싶다며 깎아달라 하더니
창가 앞에서 햇살을 맞으며 책을 읽어주고 있는 동희와
동희의 딸 아윤이 곁으로 갔다.
서둘러 사과를 깎아주자 태은이는 맛있게 집어 먹으며,
아윤이 옆에 딱 붙어서 동희가 읽어주는 책을 같이 읽고 있었다.
상황의 일단락이 되어
나는 마음을 다스리며 다시 식탁 의자에 앉아
거울을 보며 비비크림을 바르기 시작했다.
비비크림이 발리면서 얼굴의 주근깨도 가려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도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다.
수 분이 지났을까.
마침내 훈육을 마친 혜미가 유하를 데리고 나왔다.
풀이 잔뜩 죽은 유하는 엄마 손을 잡은 채로 쭈뼛쭈뼛 서있었다.
"유하, 여기 앉아. 태은아~ 태은이 잠깐 이리 와줄래? 유하가 할 말이 있대."
혜미 이모가 부르는 소리에 태은이가 얼른 유하 앞으로 와서 앉았다.
좀 전에 서럽게 울던 모습은 없고 그저 까불까불 까불거리면서.
"너 얼른! 태은이한테 사과해!"
엄마의 엄한 다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하가 말했다.
"태은아. 미안해."
태은이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얘기하는 유하의 모습에
나는 또 한 번 가슴이 철렁했다,
아까의 철렁함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그리고 그런 유하를 꽉 안아주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정말 간신히.
아이가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과
시켜서 앵무새처럼 사과하는 데에는
천지 간의 차이가 있다.
지금 유하의 사과는 너무나 진심 어린것이었다.
유하의 작은 가슴 가득 담긴 커다란 마음이 전해져서
대견하고 고마웠다.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며
나는 유하에게 물었다.
"유하야, 유하는 소중한 사람이야?"
유하는 잠시간 나의 눈을 응시하며 질문의 뜻을 곱씹는 듯했다.
나는 다시 물었다.
"유하는, 소중한 사람이야?"
"네."
두 번째 물음에 유하는 짧지만 단단하게 대답했다.
"그래 맞아, 유하는 너무너무 소중한 사람이야. 그럼 태은이는 소중한 사람일까?"
"태은이는 소중한 사람!"
질문의 뜻을 알아챘다는 듯 유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태은아, 엄마는 소중한 사람일까?"
"그럼! 소중하지!"
"유하야, 유하 엄마도 소중한 사람이야?"
"네!"
"그래 맞아. 우리는 모두모두 소중한 사람들이야.
유하도 소중하고 태은이도 소중하고.
엄마도 소중하고 이모도 소중해.
전부 다 소중한 사람인 거야.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누구를,
때려서는 안 되는 거야.
알겠니?"
유하는 다시 잠시간 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다 소중한 사람들이지만
누군가를 때린다거나
깨문다거나
밀친다거나
꼬집거나 해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순간,
그건 잘못이 되는 거야.
나쁜 행동이기 때문이야.
너희들은 아직 어리니까 또 실수할 수 있어,
하지만 앞으로 또 누군가를 때리고 싶어질 때
꼭 기억해.
안된다고 말한
엄마 얼굴을 기억해.
이건 나쁜 행동이라고 알려준
엄마의 목소리를 기억해.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아프게 하는 게 아니야.
그리고 누구도 다른 사람을 때려서는 안 되는 거야."
나는 태은이와 유하의 눈을 번갈아 바라보며
천천히 힘주어 얘기했다.
아이들은 충분히 알아들은 듯 보였다.
고개를 끄덕여가며 듣는 모습이 고마웠다.
유하는 조금은 후련해 보이는 모습으로 태은이를 바라봤고,
태은이는 아이, 뭘 이 정도 가지고?라는 듯한 어투로
"괜찮아!" 하며 유하를 꼭 안아주었다.
유하도 태은이도 서로 "사랑해."라고 주고 받고는
둘은 다시 놀이방으로 들어갔다.
변명도
허세도
왜곡 따위도 없는
본질에 충실한 사과와 화해라니,
얼마나 멋진가!
아이들의 진심 어린 사과와 화해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나는 모를 신비로움 마저 느꼈다.
#내영원한선생님들
#큰거또배워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