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날려버린 기자님
스타필드 내 카메라 코너
아이랑 남편은 장난감 코너에 정신 팔려 있는 사이
나는 바로 옆 전자기기 코너로 홀연히 이동했다.
먼저 키보드가 즐비한 매대를 한 번씩 훑어본다.
각기 다른 키감을 자랑하는
다양한 키보드들을 타건 해볼 수 있는 기회를
토미카 앞에서 멍 때리다가 놓칠 순 없지!
키보드 하나하나 설레는 마음으로 타건을 해본다.
소리도 다르고 터치감도 제각각, 디자인까지 고려한다면
마음에 드는 키보드를 만나는 건 너무 어려운 일.
중간고사*기말고사 시즌이면
알파문구에 가서 마음에 드는 펜부터 색깔별로 구비해야 했던
장비빨을 중시하는 나에게
키보드란 너무 중요한 아이템인 것이다.
아이가 기관생활을 시작하는 내년 3월을 커트라인으로 잡고
그전까지만 만나지기를 염원하며
밤마다 키보드 리뷰 유튜버들의 타건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든 지 수년.
다행히 지난달
롯데아웃렛에 열린 키보드 팝업 행사장에 가서
수십대의 키보드를 타건 해보고 겨우겨우
지금의 키보드를 구매할 수 있었다.
도각도각 보글보글 서걱서걱 퐁신퐁신 따각따각
흑축 갈축 청축 적축
키보드의 세계는 너무나 광활하여
알면 알수록 결정이 어려운데
한 번에 모두 접하고 비교해 볼 수 있는 기회였어서
역시 다녀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이미 마음에 드는 키보드를 구비해 놓은 상태에서
다른 키보드들을 구경하려니 왠지 여유로운 기분이 든다.
(이러다 더 맘에 드는 키보드를 만나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만 잘 다스린다면.)
(다행히 그런 녀석은 없었다.)
(역시 내 키보드 만세!)
신나게 키보드 타건을 마쳤는데
아직도 남편과 아들은 장난감 코너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보인다.
나는 파랑새처럼 날아든 이 귀한 평화를 뒷짐지고
바로 옆 카메라 코너로 가본다.
소니, 캐논, 니콘.. 설레는 브랜드들의 향연.
다양한 렌즈들과 더욱 콤팩트 해진 디자인,
요즘은 어떤 카메라가 잘 나왔나
오랜만에 둘러보는 마음이 또 설렌다.
카메라 잡는 게 직업이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카메라에서 키보드로 메인 도구를 바꾼 지금,
부담감을 내려놓으니 카메라를 구경하는 일이 더없이 즐겁다.
하얀색 미러리스 캐논 카메라를 하나 집어 들어본다.
바디가 한 손에 착 감기고
디자인도 깔끔하다.
전원버튼을 켜고 포커스를 잡아보려는데 불쑥
"하하 이 카메라.. 정말 잘 나왔습니다."
하며 다가오는 남자 점원.
'아... 그냥 혼자 찬찬히 살펴보고 싶은데..'
이런 순간을 상냥하게 거절하는 메뉴얼같은 건 없을까?
누가 좀 만들어서 배포해줬으면.
나보다 조금 긴 중단발에
펌을 한 것 같지는 않은데
자연 곱슬의 결이 살아있는 컬이 탱글하게 어깨선에 닿을락 말락,
흑단 같은 매끈한 머릿결이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스네이프 교수 같은 헤어스타일.
얇은 금테안경은 짐짓 날카로운 인상을 줬는데
쌍꺼풀 진 두 눈에 입꼬리가 올라간 입매,
미소 만연한 얼굴로 두 손 공손히 다가오는 모습에
나는 왠지 흥미가 생겼다.
그래서 카메라를 내려놓고 도망가려다
"아, 그래요? 뭐 새로운 기능이 있나요?"
물어보았다.
그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려는 듯 입꼬리를 실룩거리며
아주 정중하게 두 손을 뻗어 "잠시만.." 하더니
그대로 내 손에 있던 카메라를 가져갔다.
"이.. 얼굴 인식이라는 건데요.
여기 이렇게 우리 아이들.. 얼굴을 등록!
... 하실 수 있다는 거죠."
말을 잇다가 끊는 포인트가 남다른 이 사람,
제품 설명이라기보다 뭔가
1인극을 보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계속 이런 말투로 얘기하려나?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호기심이 끓어올랐다.
"아, 그러면 그 인물을 좀 더 잘 잡아주나요? 흔들림 없이? 배경은 날아가나요?"
사실 얼굴을 인식하는 기능은
카메라로써 그리 획기적이거나 생소한 특이점이 아니었다.
이미 핸드폰 카메라에서도 가능한 기능,
아니, 그전에
2004년에 내가 썼던 소니 디지털카메라에도 있었던 기능인데.
나는 그래도 이 사람을 좀 더 관찰하고 싶어졌다.
"...?
그렇.. 죠! 이제..
아이들은 굉장히... 움직.. 이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등록!... 을 하시게 되면 아무래도..."
카메라를 만지작 거리며 기능 설정으로 들어가려고 애쓰는 남자,
하지만 좀처럼 그 기능을 찾지 못하고 있다.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린다.
'이 사람, 이 카메라에 대해 잘 모른다..!'
확신처럼 알아졌다.
이럴 땐 이 사람이 알법한 당연한 질문을 해줘야겠다고,
본능처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구나. 몇 명까지 등록 가능해요?"
"몇... 명? 이게 아마.. 그러니까..."
카메라 방향키를 누르는 그의 엄지손가락,
방향키야, 그에게 정답을 알려줘.
나는 이제 그만 괜찮다는 사인을 주며
가벼운 목례로 자연스럽게 자리를 뜰 타이밍을 보고 있었다.
얼굴 인식 기능을 설정하는 방법은 찾지 못했지만
그는 이제 카메라를 만지작대며 본격 세일즈를 해보리라
마음먹은 것 같았다.
"... 저 같은 경우는 이제...
조카 운동회 찍어주러 갔다가!
그... 영웅이 됐죠!
네..! 제 동생 놈이 아들만 셋이라 하하하!"
세일즈의 기본,
스토리텔링이 시작되었다.
"아 정말요?" (아, 어디서 끊지..)
"그쵸 이제..
그러면 조카들이 지 아빠, 그러니까 제 동생이죠, 아빠한테..
'아빠는 왜 큰아빠가 하는 거 다 못해?'라고.. 하핫! 하하핫!
"아..하하. 네에..."
나는 이 사람에게 무안을 주지 않음과 동시에
이 대화를 적당히 마무리짓고 싶었지만
남자는 잘 들어, 진짜 킥 올라간다..! 라는 듯한 (정말로)
비장한 회심의 일격을 날리는데..
그럼 이제 제 동생이
'야, 큰아빠는 기자출신이잖아!'라고.. 하하하!"
나는 이제 이 남자가 과거에 기자였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다.
어쩌면 그가 처음부터 하고 싶은 말도 이거였을지 모르겠다.
남자는 자신의 적당한 허세와 유머가 꽤나 만족스러운듯 웃고 있었고
나는 배려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렸다.
때마침 남편과 아이가
"엄마 여기 있었네!" 하며 등장했고
나의 두 구원자 덕분에 극적으로
"네.. 잘봤습니다."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적당히 자연스러운] 엔딩!
#그냥토미카보고있을걸
#카메라잘봤습니다기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