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지는 건, 없다.
2024년 10월, 학동역 사거리 기업은행
카드 관련하여 은행에 갈 일이 생겼다.
전회사의 주거래 은행이 기업은행이었어서
나도 자연스럽게 기업은행에서 카드와 적금, 청약 등 상품을 들게 되었다.
결혼 전 다니던 회사 근처에 있는 학동역 사거리에 있는 지점,
친정 가는 길에 잠깐 들르는 걸로 해서 아이와 함께 은행에 갔다.
내 기준, 다 큰 어른이 작아지는 공간이 몇 있는데
대표적으로 병원이 그렇고
그다음으로 은행이 그렇다.
멀쩡한 사람도 왜 은행에만 가면 어리바리해지고
괜히 두리번대며 공손해지는지.
인간의 욕망 중 가장 정점에 있는 건강과 부,
그 두 가지를 관장하는 곳이라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평소에 그런대로 아픈 곳 없이, 부족함 없이 지내다가도
병원과 은행에 들어서는 순간 왠지
그 간의 삶을 가차 없이 평가받는 기분이 되는 거랄까.
다행히 지금의 나에겐 이런 마음을 감추기 딱 좋은
작고 따뜻한 손이 쥐어져 있다.
은행 앞 보행길에 사선으로 차를 주차하고
아이의 손을 잡고 계단을 올라 은행 문을 여는 순간,
'나, 완전 어른이잖아..?'
백색 형광불빛 환한 은행 안으로 들어서자
"어서 오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친절한 목소리가 과한 미소를 지으며 불쑥 곁으로 다가왔다.
블랙으로 위아래 정장을 정갈하게 갖춰 입은 중년의 여성,
친근하게 다가와서는
무슨 일로 오셨냐
아 그러시냐
여기 번호표 뽑고 잠시 기다려달라
.
.
.
나의 대답이 중요하다기보다
그녀의 매뉴얼을 읊고 싶은 마음이 더 커 보였지만..
병원 데스크의 간호사가 친절하게 웃어주면 황송해지듯이
그녀의 조금은 과한 친절 덕분에
조금은 작아졌던 내 키도 다시 원상복구 되었다.
그 와중에 태은이를 보시며
"아유 우리 아기 너무 예뻐요~"
소셜스킬을 잊지 않고 날리신다.
나는 아이와 함께 의자에 앉아 차례를 기다렸다.
생각보다 앞사람의 상담이 길어졌고
대기 포함해서 십 여분이면 끝나겠지 생각하고 온 방문은
상담은 시작도 못했는데 이미 십오 분을 지나고 있었다.
아이는 은행 내 틀어진 티비를 한참 보다가
지루한 듯 일어나 돌아다니기도 하고
다시 나에게 콩콩 뛰어와 안기며 잘 놀아주었다.
그런 나와 태은이를 물끄러미 보시더니
자동문 앞에 허리를 곧추세우고 꼿꼿하게 서계시다가
낮지만 뾰족한 굽의 구두를 또각이며 다가와
말을 거신다.
"아기 몇 개월이에요?"
"아, 21개월 됐어요."
"아유.. 이쁘다. 제일 이쁠 때죠?"
"네, 그렇다고들.. 해주시더라고요. 감사합니다."
아이와 함께 있으면 낯선 사람과 말을 트는 게 수월해진다.
나는 원래도 처음 보는 사람이랑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걸 좋아해서
슬그머니 다가와 말을 걸어주시는 게 싫지 않았다.
흰머리 한 가닥 보이지 않게 검게 염색한 머리카락,
중단발의 길이에 드라이를 크게 둥글리시고
뒤통수도 빠트리지 않고 한껏 뽕(!)을 띄우셨는데
전체적으로 검은 버섯 같은 느낌이 들었다.
쌍꺼풀이 짙고 큰 눈 아래로 짙게 그어진 아이라인,
60대 초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외관에 비해
늘씬하고 꼿꼿한 체형도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살아온 결이 가늠되는 부분이었다.
"아휴, 나도 내년쯤이면 저런 아가 보게 되려나.."
"...? 자제분이 계획이 있으세요?"
"아, 우리 딸이.. 다음 달에 결혼해요."
"어머 그러시구나. 축하드려요."
"네.. 아니 뭐.. 그럼 뭐 해..."
"......??"
(잠시 간 머뭇거리시다가)
"우리 딸이.. 저기, 직업도 좋고 일도 아주 잘하거든요."
"네, 그러시구나.."
"으응.. 학교 때 공부도 무척 잘했다구.. 근데 결혼하고 아기부터 갖겠다나 봐요."
"아유, 좋으시겠어요. 첫 손주면 얼마나 예쁘시겠어요?"
그녀의 이야기가 어디로 흘러갈지 왠지 쎄한 기분에,
나는 속없는 사람처럼 생긋 웃어보였다.
내 번호표는 276번,
275번 남자는 아직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인다.
"아기 낳고 나면 여자는... 자기 삶은 그냥 없어지잖아."
그녀는 태은이를 한 번 빤히 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자의 삶은
아기를 낳고 나면
없어지는 거라고.
"??? 네? 아니에요, 아기랑 함께하면서 또 값진 시간들을 겪죠~"
이 분의 생각을 바꿀 요량은 없지만
적어도 무의미하게 동조하고 싶진 않았다.
.
.
.
"여자도 하여튼 일을 하는 게 좋아요.
맨날 집에서 애만 보고 있을게 아니라
밖에 나와서 일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능력을 펼쳐야지!
나도 이렇게 매일 나와서 일할 곳이 있고.. 응?
이런 게 다 굉장히 중요하다구~"
정장자켓 안으로 빳빳한 하얀 블라우스 소매를
조금 걷어올리시면서 얘기하시는 모습에,
어쩌면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본인과 본인의 어떤 만족지 못했던 과거에게 하는 말이신가 보다
생각하게 되었다.
아이와 대동하다 보면
전에는 몰랐던 세상을 이렇게 한 번씩 접하게 되는데
아이가 예쁘다며 뭐라도 주고 싶어 하시는 나눔핑,
아이를 보며 환하게 웃어주시는 미소핑,
아이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어주고 신통해하시는 수다핑,
그리고 오늘처럼 [훈수핑]을 만날 때도 있다.
훈수핑의 대표 레퍼토리로는
"하나는 외로워, 둘은 낳아야 해."
"딸이 없어서 어째? 엄마는 딸이 있어야 해."
그리고 이 날 나는
"여자도 일을 해야 해, 애만 봐서는 안돼." 하는
새로운 레퍼토리를 만났다.
언젠가 친정엄마와 아이와 셋이 산책길에 만난 동네 할머니께서
첫째가 아들이니 둘째는 딸을 낳으면 되겠다, 딸은 꼭 있어야 해!
라고 격려인 듯 호통인 듯 신신당부를 하신 일이 있었는데
이런 류의 참견에 조금 예민해져 있던 그 당시 나는
아니, 둘째도 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은 못하시나? 하며
애꿎은 엄마에게 투덜거렸었다.
그때 엄마가 내게 해준 말이 많은 걸 바꿔주었는데
"그냥.. 저분은 당신이 인생을 살아보시니 가장 좋았던 걸 얘기해 주시는 거야."
라고.
과연 그렇다.
겪어보니 곤란했던 것, 싫었던 일을 추천하는 사람은
없을 거다.
당신이 이만큼 살아보니 이런 게 이러저러해서 좋더라- 하는 것들을
이 사람도 좋았으면 하는 마음에 얘기해 주는,
딱 그런 정도일 거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니
나의 예민함도 한 꺼풀 숨이 죽을 수 있었다.
.
.
.
은행을 나와 친정으로 가는 차 안에서
아이는 잠이 들었고
나는 꽉 막힌 언주로 어딘가에 덩그러니 서서
생각에 잠겼다.
내 삶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내 삶의 현재 우선순위가 어떻게 되든 간에
[내 삶] 자체는 없어지지 않는다.
전부 내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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