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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Mar 04. 2020

조중균 씨가 남기고 간 질문

김금희,「조중균의 세계」리뷰

조중균 씨가 남기고 간 질문

김금희, 「조중균의 세계」 리뷰


지나간 세계와 지나간 떡

테이블에 '쉰내' 나는 떡이 있다. 과거엔 따뜻하고 말랑한, 찰기 넘치고 쫀득한 떡이었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다들 상했다는 걸 눈치채고 적당히 내려놓는다. 잘 먹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조중균 씨는 '갈락 말락'하는 떡을 '아주 간 건 아니'라며 자꾸 집어먹는다. 부장이 말려도 소용이 없다. 그도 그럴 수밖에. 조중균 씨는 사실 '지나간 세계'에서 온 사람이다. 놀랍게도 그 세계에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신념을 위해 불이익을 감수하고, 나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조중균 씨는 아직 그 세계를 잊지 못한다. '지나간 세계'에 대한 가치를 여전히 품고 있다. 그러니 누군가 그 떡이 '아주 갔'다고 말해도 조중균 씨는 굴하지 않는다. '지나간 떡'을 '조용히 먹고 고요히 포만감을 느'낀다.


'지나간 세계'에는 '수업 시간의 반 이상을 야당과 '데모대' 욕하는 데 쓰는' 역사 교수가 하나 있었다. 당연히 학생들은 수업에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수업이 싫어도 유급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마침 시험에 응시만 하면 점수를 준다는 소문을 듣고 학생들은 교실로 달려간다. 시험문제는 없는데 시험시간이 끝날 때까지 나갈 수 없는 시험. 빈 시험지에 적을 수 있는 건 오직 자신의 이름뿐이다. 다른 걸 적자 감독관이 새 시험지를 주며 이름만 적으면 된다고 말한다. 대체 왜 이름만 적으라는 걸까. 조중균 씨는 곰곰이 고민한다. 그리고 무언가를 적기 시작한다.


"어머니, 깃대를 들고 거리를 걷는다"로 시작해

"우리가 버린 꽃은 말이 없네"로 끝나는 시.


제목은 「지나간 세계」


그건 데모 현장에서 불리던 '전단시'였다.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이름만 적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지는 형태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조중균씨는 부끄러웠다. (p.65)


아무것도 쓰지 말라. 침묵을 지키라는 교수의 암묵적인 요구에 저항한 조중균 씨는 유급당하고 군대에 간다. 조중균 씨는 그런 사람이다. 취직을 한 후에도 '부당한 이익'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점심시간 내내 "나는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수첩을 들고 있다 사인을 받는다. 군대에서도 자신이 옳다고 믿는 일들을 했을 것이고, 그런 그의 성격은 선임들의 미움을 샀을 것이다. 폭행이라도 당했던 걸까. 그는 '소리에 민감'하다.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나 뜬금없는 웃음, 혼잣말 따위에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래서 귀마개를 끼고서야 원고를 본다.  


아 참, 지금의 조중균 씨는 출판사에서 일한다. 회사에서는 그의 경력에 비해 '값싸다고' 채용했다. 원래는 편집자로 들어왔지만 '자기 세계'가 너무 강하다는 이유로 교정 교열을 보는 일로 업무가 바뀌었다. 다행히도 그는 '원고의 세계로 빠져'드는 데 열심이다. 저자도, 부장도 대충 해서 넘기라지만 그는 논문집과 『역사용어사전』, 『한국민속대사전』, 『조선실록해제』 등을 쌓아놓고 원고의 오류를 잡아낸다. 그리고 그런 오류들은 교정교열을 봤다면 당연히 잡아내야 할 내용들이다. 그러니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 세상은 내용에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사흘로 잡혀 있던 작업 기간을 달이나 늘려줄 없다. 그건 '드라마'같은 이야기다. 현실엔 드라마가 없다. 조중균 씨는 '교정 기한을 한 달이나 넘겨서 회사에 해를 끼쳤다는 이유로, 직무 유기, 태만이라는 명목으로 해고'된다. 조중균 씨의 해고는 쉰내가 나는 떡을 자꾸 먹을 때부터 예고되어 있던 건지도 모른다. 지나간 세계를 잊지 못했다는 증거니깐.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깐. 이익과 이윤을 위해 뭐든 적당히 해야 하는 시기에 맞지 않는, '자기 세계'가 너무 강한 사람이니깐.


이름을 적지 않겠습니다

소설의 제목은 「조중균의 세계」인데 이야기는 철저히 '나(영주)'의 시각으로 진행된다. '나'는 어떤 인물인가 하니, 같이 들어온 동기 해란 씨를 경쟁자로 인식하고, 조중균 씨의 자그마한 인사 소리에는 '나이가 되도록 사회생활 헛했'다며 '자신감을 갖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조중균 씨가 내민 "나는 나태하지 않았습니다"라고 적힌 수첩에는 서명하지 않는다. 자신을 '그런 일들과는 무관한 사람'으로,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름을 안 적는다는 점에선 같은 거 아닌가? 라는 생각은 금물. 조중균씨가 이름을 적길 거부했던 행동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라며 거부를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필경사 바틀비의 모습과 비슷하다면, '나'의 거부는 책임을 피하기 위함이란 점에서 분명 다르다.


한사코 이름을 적길 거부하던 '나'는 조중균 씨가 해고된 뒤, 소송이나 시위를 벌일지 모른다며 회사가 받아간 경위서에는 서명을 한다. 부장이 쓰고 서명만 했을 뿐이라고 하지만 서명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조중균씨와 해란 씨의 자리는 사라지고 '나'는 정규직이 된다. 만약 '나'가 조중균 씨의 작업이 "나태하지 않았'다는데 서명을 함으로써 그의 세계에 동의를 표했다면, '지나간 세계'가 아직 '완전히 간 건 아니'라는데 손을 들어줬다면 어려운 일이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경위서에 서명을 함으로써 조중균 씨와 나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 회사의 가치관에 저항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인 걸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일이 생길지 몰라 타인의 일에 쉽사리 개입하려 들지 않았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이 어디냐는 질문에 '개인적인 거'를 묻는 게 처음이라는 반응을 받을 정도로 개인적인 질문도 안 할 정도로 거리를 두었다. 하지만 결국 어디에 이름을 적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이런 '나'의 모습을 외부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비겁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현실로 가져온다면. 내가 영주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조중균 씨가 내민 수첩에 내 이름을 쉽사리 적었을 거라고 단정할 수 없다. 해란 씨와 조중균 씨처럼 자리를 비워줘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럼 이 소설은 비겁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현실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소시민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걸까. 그렇게 보긴 아쉽다. 소설의 화자는 영주이지만 주인공인 조중균 씨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衆均 [무리 중(衆), 고를 균(均)]이라는 걸 언급해야 할 필요가 있다. 중균 씨의 친구 형수씨는 중균 씨가 이름을 적지 않았다며 '드라마'가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드라마에는 주연을 빛내주는 수많은 조연들이 있다. 그리고 그게 바로 무리 중의 하나인 조중균 씨인 것이다. 수많은 조중균 씨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몫을 다 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선에서 저항했기 때문에 사회는 조금씩 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중균 씨는 어떤 사람인가.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사람이다. 아무도 점심을 굶고 돌려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때 연봉에 포함된 식대 구만, 육천 원을 받아낸다. 그리고 조중균 씨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무리 중에 하나. 혹은 균일한 무리.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공평하게 나눠 갖길 원하는. 각자의 몫에 충실하길 원하는 그런 우리들의 모습이다.   


조중균 씨의 삶은 우리에게 답을 내어주진 못한다. 하지만 질문 하나를 남겨놓고 간다.


"당신은 내 안의 진심을 마주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의 마찰을 감당할 준비가 되었습니까?"



* 김금희, 『너무 한낮의 연애』, 「조중균의 세계」, 문학동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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