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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광호 Oct 13. 2021

[인터뷰] 구원 서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요

친구 A와의 인터뷰


[인터뷰] 구원 서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요

- 친구 A와의 인터뷰


나는 타인의 감정에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게 반응한다. 타인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 큰 고통이라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해주지 않으면 내 할 일을 하지 못한다. (어, 근데 내가 할 일이 뭐더라? 걱정하는 게 내 일 아니었나?) 가족 구성원을 돌보고 구원하는 것에 중독된 공의존자의 특징 중 하나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패턴이 다른 관계까지 확장된다는 것이다. 타인을 지나치게 돌보다 보니 자아가 사라지고 공허함만 남는다. 칭찬을 어색해하고, 감정 표현을 어려워한다. 자기 자신의 욕구를 지나치게 억압하고, 타인의 감정을 우선시한다. 타고난 성향도 한몫 거들겠지만, 알코올 중독자나 강박증을 가진 사람의 가족이 이런 패턴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힘들다 말한다고 뭐가 바뀌는데?


"네가 힘들다는 걸 표현하면 분명 같이 힘들어해 줄 거야.
힘들다는 말을 하는 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같이 공감해주는 거잖아.
근데 네가 친구들에게 짐을 준다고 생각하는지 그걸 꺼려하는 거 같아."

친구 A의 말처럼 나는 "말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된다면 친구 A가 눈물을 흘리며 제발 그만 하라고 사정할 때까지 붙잡고 이야기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힘들다는 말의 무게를 알기에 나는 말을 아낀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수년, 수십 년간 힘들다는 말을 반복함에도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을 때, 스스로가 얼마나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사람으로 느껴졌는지. 그리고 자괴감과 죄책감이 삶을 어떻게 망가트리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까지 고통을 나누고 싶지 않다.


하지만 친구 A는 "힘들면 나와서 밥 먹고 이야기하는 거"라면서 "밥 먹고 대화하는 게 최소한이지만 최대인 거 같"다고 말했다. "먼저 연락을 해보"라면서 "피부로 닿지 않으면 그 누구도 너의 아픔을 알아줄 수 없다"라고 했다. 마음속에서 반감이 차올랐다. '말을 해서 뭐가 바뀌는데? 내가 몇 년 동안 같은 문제로 징징거려도 받아줄 수 있어?'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A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A한테 화풀이를 할 수는 없지. 차라리 어디서 500억 정도 떨어져서 인생이 역전되는 상상을 했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 새파란 입술. 나는 제 힘으로는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불치의 병에 걸려 쓰러져 있다. 때마침 길을 지나던 이웃나라 왕자가 쓰러진 나를 발견하고 자초지종을 묻는다. 나는 눈물을 흘리며 힘들었던 과거를 고백한다. 


"오. 가엽구나"


이야기를 들은 왕자는 첫눈에 반해 내게 입 맞춘다. 그러자 나의 몸과 마음이 씻은 듯 회복된다. 그렇게 왕자와 사랑에 빠지고 남은 생을 행복하게 살아간다.




고난과 역경의 삶이 왕자의 등장으로 단 한번에 역전될 때의 카타르시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 칼에 잘라버렸을 때의 그 쾌감. 모두가 복잡하게 생각했던 문제를 손쉽게 해결해버린다. 내 인생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길 기대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 요술방망이는 돈이었다. 내가 힘든 것도, 아빠가 힘든 것도, 사람과의 관계가 불편한 것도, 불안한 것도 돈만 있으면 다 해결될 거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주일에 오천 원씩 차곡차곡 복권을 사는 돈은 허공으로 사라지고, 헛된 꿈을 붙잡을수록 돈에 대한 욕망만 커졌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뒷 이야기가 있다. 알렉산드로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잘라버린 이후 알렉산드로는 서른셋에 요절했고, 알렉산드로스 제국도 결국 분열되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칼에 잘려나간 것처럼 말이다. 하나씩 풀지 않은 문제는 해결된 게 아니라 보류된 것뿐이다. 


선량한 피해자를 구원해주세요


문제는 내 안에 있는 것이므로, 변화도 나의 몫이다. 그럼에도 나는 타인에게 손쉽게 구원받는 방법을 원했다. 내가 누군가를 구원하려 애썼던 것과 같이 누군가 내 삶을 구원해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고 싶었지만 삶의 주인이 되려 하지는 않았다. 여성 인물을 수동적 구원의 대상으로, 남성 인물을 주체적 구원자로 위치시키는 문학이 구리다고 지적하면서 내 삶이 얼마나 구린지는 생각을 안 했다. 어쩐지 계속해서 구린내가 난다 했더니.


네가 이야기 한 적 있는 거 같은데 네가 먼저 연락 안 한다고 했잖아. 
그것도 문제가 있다고 봐. 만약에 친구들이 필요하면 친구들에게 연락해야지. 
언제까지 친구들이 연락해주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으니까.

나는 나 스스로를 피해자화 했다. 먼저 연락하지 않는 이유, 열심히 살지 않는 이유를 댈 수 있었고, 삶의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고립되었지만 밖으로 나갈 용기는 없었다. 친밀한 관계를 원하지만 나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것이 너무 수치스러워 가까워질 기회가 오면 피하기를 반복했다. 친해지면 나의 잘못이나 실수마저도 들키게 되니까. 그럴 바에 친해지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관계는 진솔하지도 건강하지 못했다. 사람을 목적이 아닌 나를 구원해 줄 요술방망이로 여겼다.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이 싫어서 다시 자책하길 반복했다.


2017년 경에 쓴 일기의 일부
글씨가 영 마음에 안 든다
아마 이 날은 술을 마시고 들어왔던 것 같다



내 삶을 바꿔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낸 나의 세계 속에서도 나는 불화했다. 도망친 곳에 유토피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나는 삶의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삶을 변화시킬 이유가 없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살아있음에 탄식했고, 어떻게 하면 세상이 망하거나 내가 죽을 수 있을까만을 생각했다. 어차피 세상은 안 바뀌고,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신에게 빌어봤지만 들어주는 이도 없었다. 내가 원하는 건 아빠가 술을 드시고 오시지 않는 것. 그거 하나뿐이었는데. 치사하게 매번 내 기도는 뒤로 밀렸다.


나는 A의 말처럼 "본인이 납득해야지만 행동"할 수 있다. 매일같이 음주와 폭력을 반복하는 아버지와 우울해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것보단, 살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훨씬 타당했다. 다만, 죽어야 할 결정적인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죽지 않았을 뿐이다. 죽어야 할 이유도, 살아야 할 이유도 찾지 못한 채 살아왔을 뿐이다. 그러니 힘들면 말을 하라는 것도, 사람들을 만나보라는 것도, 무슨 일이라도 하라는 것도 내게는 타당성이 없는 말로 느껴졌다. 


대체 왜? 내가 왜 변해야 하는데?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게 억울했다. 내가 그렇게 살고 싶었던 게 아닌데 왜 내가 고통받아야 하지? 정신과에 가고 상담을 받아야 하지? 


그럼에도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내가 왜 힘들다고 말하지 않는지, 감정을 억압하는지, 피해자가 되려 하는지 찾고 또 찾는다. 이유는 나도 모른다. 다만 나를 이해하고 싶을 뿐이다.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나의 감정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대면하려 한다. 공황이든 트라우마든 숨기고 회피하려 할수록 힘이 세진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래서 글을 쓴다. 힘든 이야기를 직접 하지 않는다 해도 내 이야기를 표출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는 건 아니니까. 


나의 모습을 나를 이해하기 위한 시도는 필연적으로 공백을 남긴다. 그리고 나는 그 공백에 집착한다. 하지만 내가 내 삶을 모두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은 착각에 불과하다. 그 여백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해가 아니라 수용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머리로 생각하고 머리로 받아들인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건 여전히 어렵다. 어떻게 해야 사람 같은 로봇, 아니 로봇 같은 사람, 아니 사람 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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