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꼬맹이가 일기장에 술잔을 그려놓고 빨간색 색연필로 금지 표시를 한다. 자그마한 손으로 색연필을 잡고 아버지가 술을 드시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슥삭슥삭 빨간색을 채우고 또 채운다. 간절히 기도하며 아빠를 기다렸던 밤처럼 진하고 간절하게 말이다. 하지만 아빠는 쿵쿵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집으로 들어와 문을 두드렸고 어둡고 긴 밤은 또다시 반복되었다.
당시에 나에게 술이란 "마시면 어지럽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른 사람은 나를 비롯한 가족이었다. 이웃이나 주변 사람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적을 수는 없었다. 우리 집이 화목하지 않다는 사실을 선생님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빠가 술을 드시는 게 싫다는 건 사실이었다. 화목한 집이어야 하지만 아빠가 술을 드시는 건 싫었기 때문에 두리뭉실하게 적었다. "우리 아버지도 가끔씩 그러신다"라고 했다. 그리곤 "아무렇지도 않은 날이었다"라면서 일기가 끝난다.
어린아이에게 부모님의 사랑은 절대적이다. 가족을 안전한 관계로 여기고, 집을 안전한 공간으로 느껴야 다른 사람과도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부모에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은 본능이다. 하지만 내겐 그 본능을 채울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고 부모님을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술은 누가 발명한 것일까?"라며 술을 만든 사람을 원망했다. 서른이 다 되어서도 아빠를 싫어하는 내 모습을 싫어했다. 부모를 사랑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내가 너무 미워서 자책하기를 반복했다.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다가간다. 그 사람이 조금이라도 불편한 기색을 보이거나, 멀어지려고 하면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해진다. 그래서 더 잘해주고 그 사람의 눈치를 본다. 그 사람이 원하는 걸 미리 파악하고 맞춰준다. 그렇게 그 사람이 나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오면 이번에는 내가 멀어진다.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취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인정받고, 조건 없이 이해받는 경험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피상적인 관계, 일정 수준 이상의 관계로 발전이 불가능하다. 그 사람이 친해지려고 한 발 다가오면 두 발 도망간다.
그 사람이 정말 호의로 좋은 말을 했어도 내가 의심을 한다. "너는 뭐든 잘할 거야" 그 말에 '네가 나를 어떻게 알아? 나는 이런 거 못하는데 네가 자꾸 잘한다고 하면 잘해야 할 거 같아서 부담되잖아.' 이런 식으로 비뚤게 받아들인다. 갑자기 하려던 일도 하기 싫어진다. 반발감이 든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었다고 그걸 안 하는 내 모습이 너무 미성숙해 보인다. 어리 석어 보인다. 그래서 그 일을 안 할 핑계를 어떻게든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이유 때문이라고 합리화한다. 그리고 그걸 굳게 믿는다. 현실은 그렇게 왜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