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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진영 Aug 15. 2023

껍질째 먹는 배는 향기롭다

2001년, 31살의 나는 가을 초입 즈음 산청에 갔었다. 초록마을 2호 잡지 구성을 위한 산지 출장으로 기억하고 있다. 선돌농원이라는 곳으로 지금은 사라진 인증인 저농약으로 농사를 짓는 배 농원이었다. 인증은 저농약이었지만 농사는 유기농으로 짓고 있었다. 인증이 중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농부의 생각과 믿음이 그대로 있는 현장이면 그만이었다.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가 완전히 개통하지 않던 시기로 산청의 관문인 생초 나들목까지만 갈 수 있었다. 생초을 나와서는 경호강을 끼고 편도 1차선 도로 따라 단성까지 갔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9월에 나오는 배 원황. 과즙 풍부한 배다. 물론 껍질째 먹을 수 있다. 

처음 갔던 길의 기억보다 더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은 ‘맛’이다. 가을이고 추석 즈음이라 원황 배가 한창이었다. 배나무 사이에는 풀이 허리 높이까지 자라 있었다. 그 사이에 돌이 놓여 있었다. 사람 다니는 길이었다. 그 사이로 들어가 배 하나를 따서는 내밀었다. 품종은 원황, “드셔 보세요”

풀은 제거의 대상이 아니라 공생이다

“이대로요?” 껍질 깎지 않은 채 먹으라고 내미는 약간 노란 색 바탕에 중간중간 파란빛이 살짝 돌았다. “그대로 그대로 일단 먹어 봐요” 손으로 쓱쓱 닦아서 내민 배를 받아 들었다. 배를 껍질 깎지 않고 먹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단단한 듯 보여도 부드러운 육질인 원황은 단맛 가득한 과즙을 품고 있었다. 단맛보다 먼저 나를 매혹한 것은 배 향이었다. 향기로운 배 향이 입안을 가득 채운 다음 부드러운 과육과 달곰한 과즙이 그제야 입안에 들어왔다. 처음 경험한 배 향이었다. 전에 먹었던 배는 달고 시원한 맛만 있었다. 배 향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배 음료만 생각이 날 것이다. 그보다는 여리지만 청아한 향이 입안을 산책하듯 나긋나긋 다녔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껍질째 먹는 배가 이렇게도 맛이 좋았나 싶었다. 배는 그저 제사상에나 놓는, 명절 때나 맛보거나 고깃집 후식, 냉면의 고명 아니면 맛볼 수가 없던 과일이었다. 가끔 마시던 배 음료가 전부였다. 이런 배에 대한 무지가 정부환 생산자가 내준 배 하나에 바로 드러났다. 지금껏 배를 외형으로 판단한 내 자신에 대한 반성을 하기 시작했다. 배도 참으로 향기로운 과일임을 알았다. 6년 차 식품 MD 머리속에 품종과 재배 방법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는 것이 처음 심어진 날이었다. 후에 2입 배 구성을 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배는 제사 때만 먹는 게 아니다!

지베렐린과 제초제를 사용한 배 농원. 과육은 크다. 향은 없다 

배라는 과일은 명절 선물 때문에 단맛은 남고 특유의 맛은 사라진 과일이라 생각한다. 유통업자(나를 포함해)가 명절 때 가장 선호하는 것이 배 ‘1다이 또는 1상’이다. 15kg 상자에 배가 20개 미만의 대형 과를 보통 그렇게 1다이라 부른다. 그보다 조금 작은 21~30개를 2다이라 한다. 배 선물세트 7.5kg 기준으로 6~7개 정도 크기라 생각하면 딱 맞다. 작은 것들은 주로 혼합 세트로 구성한다. 대부분 선물용으로 재배하고 판매를 한다. 크기와 외형이 예쁘장한 것을 당연시하게 됐다. 크기를 선호하다 보니 모양 좋고 크게 자라는 신고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또한, 성장 호르몬 사용을 당연하게 여겼다. 성장 호르몬은 쌀과 관련한 균에서 추출한 것으로 미생물의 이름을 딴 지베레린을 주로 사용한다. 과일의 크기를 크게 하고 원래 익는 시기보다 빠르게 당긴다. 호르몬 처리한 과일은 세포 분열을 통해 몸집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세포 하나하나의 크기를 키우게 된다. 이런 능력(?) 덕에 과일의 크기가 자연스레 키운 것보다 커진다. 배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과일에서 크기와 숙기를 위해 사용한다. 성장 호르몬은 크기만 키운다. 설탕 한 숟가락을 물에 탄다고 가정했을 때 반 컵에 담긴 물과 한 컵 가득 담긴 컵 어느 것이 더 달까? 라는 질문을 굳이 하지 않더라도 알 것이다. 성장 호르몬 처리한 것이 한 컵 가득 담긴 물잔과 같다. 맛이나 향이 호르몬으로 커진 몸통만큼 여리다. 우리가 먹고 있는 대부분 배가 선물세트 문화로 인해 왜곡된 배 맛을 보고 있다. 수많은 배가 있다. 한아름, 원황, 황금, 슈퍼골드, 신화, 추황, 장십랑, 화산, 그린시스 등이 있다. 신고는 다들 알 것이다. 일본에서 육종한 배로 우리가 먹고 있는 배 대부분이 신고다. 저장성이 좋다. 저장성이 좋다는 것은 껍질이 두껍다는 것이다. 주로 신고만 먹어왔기에 배는 껍질을 까야 한다고 여긴다. 

자르기만 하더라도 과즙이 흐를 정도다. 한아름배의 특징이다.

한아름, 원황, 황금 등 추석 전후로 나오는 배는 껍질째 먹는 것이 좋다. 더 향기롭고 전에 먹어 보지 못한 배 맛을 느낄 수가 있다. 껍질째 먹는 배의 시작은 한아름 배다. 과즙이 풍부하고 향이 좋은 품종으로 늦여름의 대표 과일이지만 햇사과나 복숭아 밀려 널리 퍼지지 못했다. 게다가 고추 농사의 탄저병처럼 배에는 흑성병이라는 것이 있다. 이 병에 약한 것이 한아름 배다. 농약 없이 유기농으로 키운다는 농부의 노력이 몇 배로 해야 겨울 해낼 수 있다. 그만큼 귀한 배다. 한 가지 더, 여름 배는 석세포가 거의 없다. 석세포는 배를 먹을 때 느끼는 까끌까끌한 식감을 느끼게 한다. 세포벽이 단단해 저장성을 좋게 하기도 한다. 여름 배는 이런 석세포가 없어 식감이 부드럽다. 대신 저장성이 없어 빨리 먹어야 한다. 주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 여름 배는 저장성을 잃고 맛을 얻었다. 초당옥수수와 처지가 같다. 

좌는 제초제를 써서 풀을 제거했다. 풀이 있으면 벌레가 나무까지 오르지 않는다. 풀을 제거하면 벌레가 나무에만 모인다. 농약이 필요한 순간을 맞이 한다. 


#유기농배 #한아름 #정부환 #선돌농원 #서있는돌 #배 #신고 #황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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