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둘릴 것 없던 내가 EX에게 휘둘렸던 이유
집을 사고 나니 잊었던 옛 남자친구가 떠오른다. 소개팅 첫 만남에서 자신이 집을 샀다는 이야기를 했던 사람이었다. 집을 사 본 적 없는 나는 그가 너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부동산 뿐만 아니라 경제적 자유를 꿈꾸는 남자였다. 그래서 나의 경제적인 면도 검증하고 싶어했다.
어느날 그는 50문 50답 문항을 준비해왔다. 서로에 대해 더 알아 보자며 50개의 문항에 각자 답을 적어 교환하자고 했다. 나는 50개의 문항 중 그가 가장 궁금해하는 1개의 문항이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신의 연봉은?] 이라는 문항이었다. 내가 적은 50문답을 읽자마자 그는 물었다.
“정말 연봉이 이 정도야?”
역시 나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경제적인 부분에 큰 관심이 없던 나는 연봉을 최소치로 기재했고 일부러 남자친구에게 우는 소리를 했다.
“우리회사 정말 박봉이야. 그렇지?”
“어. 생각했던 것보다는 낮네.”
하지만 사실, 그는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새로운 회사에서 다시 산정한 호봉을 받고 있었다. 그가 적은 연봉은 영끌 연봉 같았다. 사실은 내가 그보다 연봉이 높았지만 나는 굳이 정확한 연봉을 따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를 이기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가 월급을 알뜰하게 모아 집을 산 성실하고 경제감각 있는 믿음직스러운 남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만날 때마다 자랑했던 자신의 집에 나를 초대했다.
"여기 봐. 한강이 보이지?"
"와. 야경 너무 멋있다."
개방된 아파트 복도에서 한강대로가 보였다. 그는 나보다 아파트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보는 편이었다. 그래서 이런 말들을 했었다.
"아파트를 사고 나니까 아파트만 보여. 한강이 보이는 방향으로 창문이 난 아파트들을 보면 좋은 아파트라는 게 보여."
"아참. 아파트를 사고 몇개월이 안 지났는데 벌써 3천만원이 올랐어."
"노후에는 아파트를 주택연금으로 돌려서 따뜻한 동남아에서 편안하게 살거야."
지금은 알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가 산 40년 구축 아파트의 1.5룸 시세는 약간의 목돈과 퇴직금과 대출로 나도 살 수는 있는 곳이라는 것을. 하지만 나는 사지 않을 곳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우리는 맞지 않는 사람들이고, 우리의 만남이 헤어짐으로 가고 있다는 걸 몰랐던 것처럼.
내가 그를 멋있다고 생각할수록 그는 나를 은근슬적 무시하며 말했다.
"너도 부동산 공부좀 해야지."
"그럼 나도 가르쳐줘."
"글쎄. 나는 요즘 부동산 경매 공부 중인데, 할 게 많아서."
심지어 그는 전에 만난 여자친구가 부동산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며 그녀와 나를 비교한 적도 있었다. 나는 말했다.
“그럼 나도 같이 공부하면 되잖아.”
그는 그냥 결혼하면 자신의 집으로 들어오면 된다. 자신의 계획에 따르면 된다는 식이었다. 내가 모은 돈이 적다고 생각한 그는 나의 개인적인 소비에도 간섭하기 시작했다.
“우리 결혼할 사이잖아. 앞으로 30만원 이상의 물건을 사고 싶으면 서로 상의하고 사도록 하자.”
나는 집이야말로 결혼할 사람과 상의해서 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은 언제든 살 수 있었다. 그것이 그와의 만남을 통해 유일하게 배운 것이었다. 그와의 만남에서 얻은 반면교사의 힘으로 나는 지금 내가 원하는 집을 매매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의 집을 본 순간부터 나는 알고 있었다. 그 집은 내가 바라던 집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미혼 여자들도 내집마련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집마련을 공부하는 것은 내가 바라던 집에 대한 공부이기도 하다. 집을 사지 않더라도 공부를 해야 앞으로 함께 집을 살 사람과 동등한 입장에서 대화할 수 있다. 내가 산 30만원짜리 물건은 인정하지 못하면서도 본인이 대출로 산 몇억대의 집은 받아들여야 하는 당연한 관계. 그런 관계를 경험하지 않기 위해서도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