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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잠 Apr 23. 2021

딸 같은 사람에게 그렇게 말하지 맙시다.

인정(人情)에 호소하는 방법은 소용이 없다.

“언니 이 팻말 치울까요?”

치울까요. 진짜 있으나 마나에요. 이게 무슨 소용이야. 치워도 될 듯.”     


직원들은 일하는데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팻말을 보며 조소(嘲笑)를 머금었다. 그날도 종합안내소에서 민원을 처리하고 있었다. 종합안내에서 민원을 처리하는 것이 힘든 이유는 고객지원실에서 다른 직원들과 함께 앉아있다가 함께 민원인을 맞이하는 여유로운 일(*일이 정말 여유롭다기보다 상대적으로 종합안내소에서는 마음의 여유가 없다는 의미이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종합안내 직원은 한 명 또는 두 명(*일을 묵묵히 잘하면 다른 한 명의 직원을 빼고 한 명만 근무시킨다.)만이 근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 명 또는 두 명의 직원은 대한민국 대표 기차역을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전쟁터에 홀로 남겨진 최후의 장수와도 같은 마음으로 싸우게 된다. (!)

바쁜 상황에 민원을 소화해야 하기 때문에, 더욱 마음의 고통을 겪는 것 같다. 같은 욕설을 듣더라도 편안하고 여유로운 환경에서 들을 때 느끼는 충격과 천지 차이다. 이런 일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회사에서 해 주는 일이라고는 아주 작은 팻말을 세워 놓는 것이었다.      


[여러분의 앞에 있는 직원 또한 여러분의 가족일 수 있습니다.]     

어떤 고객도 팻말에 적힌 이 글귀를 읽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의 지론(持論)이자 정설(定說)이었다. 그러나, 그 글귀를 읽는 고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바로 어떤 고객이 남기고 간 한마디의 조롱 덕분이었다.     

“우리가 가족이에요?”
“네?”
“여기 그렇게 쓰여 있는 거 안 보여요? 우리가 왜 가족이냐고요?”
“.......”          




어김없이 어느 날도 민원인이 왔다. 약관에 대해 설명을 해 드려도, 울분어린 말을 잠자코 들어 들어도 그는 진정하지 못했다. 반환이 안 되는 승차권을 환불해 달라고 그는 크게 소리쳤다.

보통은 이러한 민원인이 앞에 있으면 뒤에 있는 고객들은 자신들도 급하게 물어볼 것이 있다는 재촉의 눈빛을 보낸다. 또는 “급해요. 저 먼저 빨리 처리 좀 해주세요.”라고 중간에 끼어들기도 한다. 이렇듯 민원인이 있는 자리의 뒤에는 항상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고객들의 줄이 생겨난다. 하지만 그날은 조금 다른 일이 일어났다. 이 상황을 못마땅하게 지켜보고 있던 한 중년의 남자 고객이 민원인을 향해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아니, 딸 같은 사람한테 그렇게 심하게 말하지 맙시다.”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만 드라마였다. 그런 말을 들은 민원인이, ‘아이고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딸 같은 직원에게 말이 심했네요. 사과하겠습니다.’라고 했을 것 같은가? 현실은 달랐다. 민원인과 그 고객님의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 싸움을 말리게 되었다.   

   

“고객님. 걱정 마세요. 저는 자주 겪는 일이라 괜찮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민원인이 자리를 떠난 뒤 나는 멋진 고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했다. 민원인의 폭격을 맞은 그 고객님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채 자리를 떠났다.          




또 어떤 날이었다. 그날은 부정승차자를 열차에서 인계받아 부가운임을 받는 일을 했다. 열차에서 그녀를 모시고 안전한 홈그라운드인 고객지원실에 다다르기까너무나 고됐다. 그 5분에서 10분여의 시간 동안 그녀는 나에게 많은 말을 했다. 나 혼자 감당하긴 힘든 사람이었다. 일단 고객지원실에 모시고 가서 팀장님께 도움을 청해야 할 정도의 고객이라는 판단이 섰다.


하지만 팀장님 앞에서 그녀는 나와 나눴던 이야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척 팀장님께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할인 대상자가 아닌데도 할인 승차권을 지속적으로 이용한 고의적인 부정승차자였고 10배의 부가운임을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팀장님께 나와 나눈 적 없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조소(嘲笑)를 머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나의 표정이 포착되었다. 공격이 최고의 방어라 생각하는 그들의 전략에 맞게 나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저 직원 표정도 그렇고 진짜 싸가지 없다. (여기까진 그녀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 그렇게 느낄 수도 있었음)

그리고 저 직원이 설명도 일절 안 해줬다. (명백한 거짓)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고객의 인정(人情)에 호소해보기로 했다.     

“고객님....... 저도 감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고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분명 저랑 아까 사무실 들어오기 전에 다 이야기했는데 팀장님 앞에서 다른 말씀을 하시니 제 표정이....... 그게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하지만, 고객님. 그래도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는 겁니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를 들은 고객의 반응은 무정(無情)했다.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그 고객은 나를 계속 흉보았고, 실컷 나의 흉을 본 뒤에야 팀장님께 부가운임을 납부하고 자리를 떠났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제가 잘못했습니다.”

남자 직원 앞에 무릎을 꿇는 고객이 있었다. 세상에나 마상에나. 내가 죽기 전에 이런 희귀한 장면을 볼 수 있을 줄이야. 충격이었다. 남자 직원은 그를 용서해주기로 했다.


무릎을 꿇은 그는, 남자 직원에게 묻지마 폭행을 한 사람이었다. 남자 직원은 불행 중 다행히도 CCTV 앞에서 폭행을 당했다. 그것을 증거로 남직원은 경찰에 그를 고소했고 그의 사과를 받기 전까지 고소를 취하하지 않을 요량이었다. 폭행과 폭언을 일삼던 그가 경찰의 조사를 받고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니 마음이 급해진 모양이었다. 다시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고 그는 고소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나는 다행히도 (아직) 신체적인 폭행을 당해본 경험은 없다. 하지만 정신적인 폭행을 너무 많이 받던 그 시절, 철없이 생각했다.

‘증거가 명백한 신체적 폭행을 당하면 고소라도 할 텐데’하는 이상한 부러움을 생각했다.

물론 폭언도 녹취를 하고 증인을 모으고 CCTV를 확보해서 모욕죄로 고발할 수 있다는 것쯤은 법을 찾아보고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바쁘고 급박한 상황 속에서 녹취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폭언이 끝난 후에 겨우 다급하게 핸드폰을 꺼내는 일은 소용이 없는 일이었고, 종합안내소에서 공용으로 보관 중이던 녹음용 기계는 현실적인 쓸모를 찾지 못하고 방전 중이었다.   

   

[여러분의 앞에 있는 직원 또한 여러분의 가족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정에 호소하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어떤 상사에게 열악한 근무 환경에 대해 정중하게 건의해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그 일 하기 싫어서 환장했다'는 이간질과 헛소문 뿐이였다. 서로가 서로를 지켜줄 여유마저 없는 근무 환경이었다. 얼마 뒤인 2018년부터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었고, 어떤 회사들은 이에 맞춰 고객응대 근로자 보호를 위한 조치들을 마련해가기 시작했다.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해, 고객응대 근로자에게 폭언, 욕설, 성희롱 등을 할 경우 처벌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회사의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면 들을 수 있는 안내 멘트에 나는 아직도 부러하는 처지다. 업자 무정(無情)하고 강경한 대응을 하지 않고 고객의 인정에나 호소하고 있다면, 로자는 성 민원인들로부터 결코 보호받을 수 없을 것이다.             




「산업안전보건법」

[시행 2018.10.18.] [법률 제15588호, 2018.4.17., 일부개정]

◇ 개정이유 및 주요 내용

최근 제조업 중심의 산업사회가 서비스산업을 중심으로 빠르게 변화하면서 업무수행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조직적으로 요구된 감정을 표현할 것이 요구되는 ‘감정노동’이 증가하고 있으며, 장시간 감정노동으로 정신적 스트레스 및 건강장해 등의 피해를 겪는 근로자가 늘어나는 실정임. 이에 사업주로 하여금 고객응대 근로자에 대하여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한 건강장해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마련하도록 하고, 고객응대 업무에 종사하는 근로자에게 건강장해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현저한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업무의 일시적 중단 또는 전환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조치를 하도록 함으로써 감정노동근로자의 건강권을 보장하려는 것임.     


◇ 주요 내용

제26조 ① 사업주는 산업재해가 발생할 급박한 위험이 있을 때 또는 중대재해가 발생하였을 때에는 즉시 작업을 중지시키고 근로자를 작업장소로부터 대피시키는 등 필요한 안전·보건상의 조치를 한 후 작업을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

제26조의 2 ② 사업주는 고객의 폭언 등으로 인하여 고객응대 근로자에게 건강장해가 발생하거나 발생할 현저한 우려가 있는 경우에는 업무의 일시적 중단 또는 전환 등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필요한 조치를 하여야 한다.

③ 고객응대 근로자는 사업주에게 제2항에 따른 조치를 요구할 수 있고 사업주는 고객응대 근로자의 요구를 이유로 해고, 그 밖에 불리한 처우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72조 ④ 1의 2. 제26조의2제2항에 따른 조치를 하지 아니한 자

제68조 2의 2. 제26조의2제3항을 위반하여 해고, 그 밖에 불리한 처우를 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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