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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잠 May 03. 2021

역무원이 설명하지 않는 이유

설명했지만 듣지 않았다고 한다.

"줄이 왜 이렇게 길어. 여기서 표 끊을 순 없어요? 빨리 기차 타야 되는데. 시간 없어요. 표 좀 끊어 주세요."


기차역 종합안내에서 근무할 때 나는 이런 말을 하루에도 수십번씩 들었다. 하지만 특별한 날을 제외하고 매표소 줄이 길다는 이유로 원하는 기차를 놓칠 확률은 매우 낮다. 매표소 옆에는 휴식을 취하고 있는 많은 자동발매기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표소 줄이 길다는 민원을 제기하는 고객의 경우 자동발매기를 사용하지 못한다. 이런 경우 역무원이 직접 고객과 동행하여 자동발매기 사용법을 알려드리거나, 줄이 길지 않은 역사 내 다른 매표소로 가실 것을 권한다.

바로 윗 층에 위치한 매표소는 1층이 아니라는 이유로 줄이 길지 않았다. 한 층만 올라가면 대부분의 고객은 본인이 원하는 기차의 승차권을 예매하게 된다. 물론 열차 출발 5분 직전에 와서 나는 죽어도 이 기차표를 사야 한다는 사람은 예외다.   

  

"아 그냥 여기서 끊어주시면 안 돼요? 지난번에는 끊어 주던데요."
"고객님 죄송하지만 여기는 매표소가 아닙니다. 한 층 위에 있는 매표소는 줄이 길지 않은 편이니 그곳을 이용해주시면 됩니다."
"아 되게 불친절하네. 재수 없어."


여기는 매표소가 아니니까 매표를 하지 않는다는 당연한 사실을 말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돌아서서 가는 고객은 내가 들을 수 있는 크기의 목소리로 나의 불친절에 대해 비난했다. 어쩌면 지난번 어떤 직원 또는 내가 베풀었을지 모르는 친절과 호의가, 이번에는 불친절과 불편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것이다. 지난번에는 해 주었는데, 왜 이번에도 해 주지 않냐는 점에 고객은 불편함을 느낀다. '불친절'이라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참 주관적이다. 그래서 역무원은 차라리 일관성 있게 불친절한 것을 선택한다.           



"그냥 여기서 표 끊어주면 안 됩니까? 여기도 매표소로 만들던가. 여기가 매표소가 아닌 것에 민원을 좀 제기할까 하는데?"

그날도 똑같은 불만을 들었다. 나는 대답했다.     


"고객님. 저도 고객님이 생각하신 부분을 예전에 고민해본 적이 있습니다. 다만 종합안내소를 매표소로 만들면, 여기도 매표소처럼 매표를 원하는 고객들로 줄이 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줄을 서지 않고 곧바로 고객님과 대화할 수 없게 됩니다. 표를 사려는 고객님 역시 여기서도 줄을 서서 기다리셔야 하는 건 물론입니다."


나의 말을 들은 고객은 '그러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라고 대답하며 쑥스럽게 웃었다. 어떤 설명을 해 드려도 욕을 먹는 게 일상인 안내 직원으로서 나는 내심 속으로 놀랐다.     

'와. 내 말을 들어주는 고객님이 계시다니.'

그래서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그분을 기억한다.      



하지만 모든 말은 실패로 흘렀다.

다년간의 서비스직 경험을 통해 얻은 결론이다. 논리는 무논리를 이길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완벽의 논리로 고객을 설득한들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애초에 논리적인 설명을 듣고자 민원 창구를 방문하는 고객은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민원을 제기하는 모든 고객들을 폄하할 의도는 없다. 기회가 된다면 매우 합리적이고 고맙기까지 했던 민원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민원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바가 관철되지 않은 것에 대해 분노하는 것'을 목적으로 역무원을 찾는다. 그리고 분노의 끝에 서비스직 종사자들이 주는 달콤한 편의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타는 곳에 안내 직원이 없어서 내가 기차를 놓쳤으니 기차표 값은 물론 내가 놓친 시간에 대해 모두 보상하세요."     


"기차가 왜 정시에 출발한 거죠? 뛰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기다렸다가 문을 닫아야 할 것 아니에요!"


공사의 귀책사유(열차 지연, 파업 등)로 인한 불편에 대해서는 승차권 금액의 전액 환불 또는 지연 보상액 지급이 가능하다. 하지만 '전철이 5분 지연돼서 열차 출발 시간 이후에 기차역에 왔는데 왜 기차표 금액 전부를 반환받을 수 없느냐', '열차가 왜 정시에 출발한 것이냐'를 주제로 장시간 고객과 씨름해야 할 때는 정말 '논리란 무엇인가', '상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에겐 승차권 금액에서 반환수수료를 공제한 잔액이 환불될 것이다. 결국 규정대로 처리가 되지만 언제나 역무원의 말은 전달에 실패한 채 허공을 맴돈다. 역무원이 말을 하는 걸 금지시키고, 그냥 여객의 말을 듣게만 하는 규칙이 생겨도 상관이 없을 것 같은 느낌이다.     


"지난번에는 늦게 출발했잖아요. 이번엔 왜 정시에 출발하죠? 잘못된 것 아닌가요?"   

  

"전철이 5분 늦게 도착하지만 않았어도 저는 남은 5분 안에 KTX를 갈아탈 수 있었는데. 전철이 5분 늦어서 놓친 기차에 대한 보상은 왜 안 된다는 거죠?"


고객의 질문에 성의껏 대답한 상태였지만, 고객은 똑같은 질문 세례를 실컷 퍼부은 뒤 씩씩거리며 돌아섰다. 감정노동 종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객들이 자신들의 화를 모두 분출할 때까지 이를 받아내는 것밖에 없었다.      


                         


당신만의 불합리함

당신이 놓쳤다는 몇십억짜리 계약 미팅, 당신이 늦어서 볼 수 없었던 입사 면접이나 시험....... 듣다 보면 나 또한 인간적으로 마음 아프다. 당신은 이 불합리함(?)을 개선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의 불합리함을 당신의 편의대로 개선하는 것이 다수의 사람에게 불합리함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는 점이 문제다. 당신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민원을 제기해서 '당신만 받을 수 있는 특별한 보상'에 대해 기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객님. 고객님께 제가 표를 살짝 끊어드리면 저기 줄을 서서 기다리시는 다수의 분들은 손해가 됩니다. 정말 다급한 경우 고객님을 도와드릴 순 있겠지만, 그것은 아무런 대안이 없을 때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대안으로도 고객님은 충분히 열차표를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승차권 예매 어플은 불편해서 쓰기 싫으시다고 하셨는데, 제가 사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고객님. 승차권 금액 외의 추가적인 보상은 규정에 없는 부분입니다. 고객님이 열차를 놓쳐서 발생한 고객님의 귀한 시간에 대한 손해는 금액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수백번도 더 말을 했지만 어차피 전달에 실패할 말이라는 걸 안다. 당신이 놓친 소중한 시간에 대해 보상하려면, 보상을 위해 보험을 들어야 하고 보험료 부담은 열차 운임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설명까진 절대 하지 않는다. 얼마나 긴 말꼬리 잡기가 시작될 것인지 상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안다. 논리는 무논리를 이길 수 없다. 상식은 몰상식을 이길 수 없다. 그러니 무논리와 몰상식은 안 만나는 게 상책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논리로 무장한 이들을 피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역무원의 숙명은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들은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들을 생각은 없다. 그래서 굳이 설득에 애를 먹을 필요는 없다.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계속 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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