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을 금지하니 가스라이팅

갑질 금지의 풍선효과

by 낮잠

친구나 지인 중 그런 사람이 있다. 무엇인가를 한다고 하면 '해도 안 돼'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해서 뭐 해. 소용없어. 어차피 안 돼]라며 오늘은 본인과 술이나 먹자고 권하곤 한다. 나는 그들과 서서히 멀어지기를 선택했고 영양가 있는 일상을 얻었다.


문제는 회사다. 공기업 현장에서 근무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대부분의 성향이 관성을 따르는 편이라 발전적인 이야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고, 그런 사람들과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가치관의 차이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


스트레스성 위염에 음식이 안 삼켜져 약을 삼켜야 하면서도 나는 그들을 손절할 수도 없을뿐더러 그들에게 직언을 하기도 어렵다. 어머니 뻘의 나이 차이가 나는 상하 관계에서 부드럽게 돌려서 말하는 것은 통하지 않는 법이다. 하급자가 돌려서 말하는 내용을 귀 기울여 듣고 그 말의 속내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상급자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애초에 말을 섞지 않으면 되지 않느냐고? 상급자는 하급자에게 다가와 '말을 좀 하라'는 신호를 준다.


'오늘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지?' (반복)


'너무 심심하네.' (반복)


'지난번에 OO대리랑 근무하면서 수다를 실컷 떨었는데 시간도 금방 가고 너무 재미있었는데.' (반복)


이런 반복적인 말들을 완벽하게 무시할 내공이 생긴다면 애초에 말을 섞지 않는 방법도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 같다. (에어팟 한쪽에 꼽고 '맑눈광'으로 살라는 주변의 조언을 받았는데 제발 좀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이 정도의 고충은 직장인으로서 필연적인 것이다. 능력을 키워서 프리랜서로 가지 않는 한 영원히 끝나지 않을....역시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말씀이실까요.


하지만 갑질 문제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종종 목격하게 되는 '갑질'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 것까지 직장인의 몫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야 하는 것인지 고민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


나는 성인이 된 후로 누가 대신 강제로 '팀장 지원서'를 제출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듣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부모가 회사에 전화해 자식을 어떻게 해달라고 한다는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는 들었어도, 상사가 후배의 지원서를 대신 써서 제출해 준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러한 웃지 못할 상황의 내막은 팀장에게 아무 혜택도 주지 않는 회사의 인사 제도에서 출발했다. 병이 있으면 그 병을 치료를 할 생각을 해야 하는데, 조직은 병이 있으면 다른 병으로 그 병을 돌려 막고자 했다.


누구의 머리에서 나왔는지 아주 기가 막힌 아이디어! '팀장 시험 응시 할당제'를 성과에 포함시켜 응시자가 없는 소속에 불이익을 주기로 한 것이다. 심지어 시험에 응시하는 직원을 만들면, 높으신 간부님들의 성과가 될 수 있게끔 해서 암암리에 갑질을 독려할 수 있는 판까지 깔아 주었다.


놀랍게도 카톡방에 공식적으로 올라오는 내용들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듯했다. 그 영광스러운 팀장의 자리가,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임, 대리'를 위한 것이니 제발 해달라는 것!


경력을 갖춘 차장, 과장님들은 그냥 두고 힘없는 주임, 대리에게 그 자리를 주겠다고 조직은 열심이었다. 이 얼마나 수평적인 조직인가? 어떤 과장님은 본인이 컴퓨터를 할 줄 몰라 그 일을 하실 수 없다고 말씀하실 정도니 컴퓨터 사용이 능숙한 주임, 대리에게 팀장 자리는 안성맞춤 아닌가! 정말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보는 카톡방에서도 공식적으로 강제로 팀장 시험을 신청해 준다는 둥, 신입사원에게 기회가 열려있다는 둥 기괴한 이야기들이 나오는데 공식적이지 않은 자리에서는 어떤 말들이 오고 갔을까. 자세한 말은 생략한다.


자세한 말들은 익명 게시판들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갑질 신고를 고민하고 있다는 글과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고 그런 글들을 보며 생각했다. 갑질을 하는 사람도, 갑질을 당하는 사람도 갑질에 대해서 잘 모른다. 특히 노동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범위까지가 갑질에 해당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피해를 받아도 대처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에서 갑질방지교육이란 걸 하고는 있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이 회사 입장에서의 교육이 될 수밖에 없는지라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교육 내용을 잘 들어보면 재미있다. 갑질신고가 들어왔을 때 회사가 입는 타격을 우려해서 '갑질신고방지' 차원의 '갑질방지' 교육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은연중에 느껴지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 친구들의 감수성은 옛날 세대와 달라서 옛날 세대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들, 참고 넘어갔던 것들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구태의연한 멘트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갑의 관점에서 갑질을 해석하니 교육 내용도 이렇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갑질이 아니냐는 익명 게시판의 내용들이 게시판을 달군 것도 잠시였다. 갑들은 이제 갑질 논란을 피할 수 있게 '가스라이팅'으로 전략을 선회했다. 마치 부동산 투기를 규제하면 정책의 의도와는 다르게 풍선 효과가 발생하는 것처럼, 조직의 갑질을 규제하니 가스라이팅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동안 같이 근무하던 선배님들의 송별회였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까진 아니고, 누군가 '잘못 초대한' 손님이 왔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잔치급으로 열심히 준비한 좋은 자리였는데, 하필 잘못 초대한 손님이 와서 자리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며 힘없는 대리와 주임들에게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같이 근무한 선배님들에게 감사의 말을 건네는 자리가 힘없는 주임 한 명을 칭찬하는 자리로 변질되었다. 잘못 초대된 그 손님은 자신의 말에 순응한 힘없는 주임을 열심히 칭찬하더니, 다른 소속에서도 도전하겠다는 신입이 늘어난다며 허풍선을 계속 만들어 날렸다. 순응하지 않은 그 자리의 다른 직원들에겐 갑질 대신 위로의 가스(?)를 전했다.


"서운했져~ 죄송해여~ 어쩔 수 없었어여~"


그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본부 본사에 지원해서 업무에 빨리 적응하고 경력을 쌓은 다음 팀장을 하고 싶습니다."


"혹시.. 빽 있어요? 빽이 있나 해서 가만히 있었는데요. 못 가실 것 같아요. 팀장 시험 응시 못하겠다고 하면 저도 본인을 도와줄 수 없을 것 같아요."


서운한 대화의 기억은 대략 이렇다.



돌이켜보니 '그거 해도 어차피 안 돼'라고 말하던 친구들과 회사 사람들이 결국은 맞는 말을 했다. 해도 어차피 안 되는 것이 사회생활이었다. 정치력 앞에 무력한 것이 바로 '노오력'이었다. '노오력'하는 자가 관운이 있는 자를 결코 넘을 수 없는 것이 조직이었다.


그래도 나는 (굳이 나에게 올 리 없을) 그 운을 구태여 먼저 손절하고 산다. 나는 '그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라고 종종 말한다. 직급은 높지만 일은 할 줄 몰라서 못한다는 어떤 선배처럼 될까봐 본부나 본사에서 안 해본 일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하고, 어차피 안 된다고 비웃음을 당하고, 지원서를 쓴다. 안 된다고 말하는 주변 사람들을 손절해 온 근성으로 산다. 나이 먹을수록 배우는 능력이 떨어지는 것을 걱정하며 작은 월급을 털어서라도 강의를 듣고 공부하러 다닌다. 사실 이 조직에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노오력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들을 답습하지 않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것에 희망을 걸고 스스로를 가스라이팅하며 다시 나아갈 힘을 얻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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