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쩔 수가 없다>를 보고 든 생각
사회복무요원이 차를 끌고 출근하다가 접촉 사고가 나서 사고 처리를 하느라 회사에 늦었다. 필요한 곳에 다 들렀다가 천천히 오라는 나의 말에도 사회복무요원은 서둘러서 일을 마무리하고 온 기색이었다. 그는 오늘 근무하는 사회복무요원이 자신밖에 없는데 출근하지 않으면 안 되지 않느냐며 죄송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일은 어떻게든 다 되니까 그런 생각하지 말아요. 본인이 제일 중요해요. 너 없으면 일이 안 되니까 네가 있어야 해, 네가 꼭 와야 해라는 말은 알고 보면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더라."
나는 직장생활에서 수도 없이 들은 이야기에 지쳐 있었고 잘 알고 있었다.
'너 아니면 할 사람이 없다는데 어떻게 해.'
'네가 이 부서를 떠나면 당장 충원할 인력이 없다는데 어떻게 해.'
'사람이 없어서, 사람이 구해지려면 시간이 오래 걸려서….'
나는 십여 년째 사람이 없다는 회사를 다니고 있다. 그런데 우리 회사의 임직원은 거의 3만 명이고, 나와 같은 직렬의 사람은 전국에 3천여 명이다. 그 규모에도 사람보다 일이 더 많은 상황일까?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 업무는 네가 해야 한다고 한다.
파킨슨의 법칙과도 같다. 업무가 많아지면 본인과 동료가 일을 나눠서 하려고는 하지 않고, 자기 밑의 사람을 어떻게든 끌어와서 시킬 생각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사회복무요원이 사정이 생겨도 그가 맡은 일은 나도 다 할 수 있어서 걱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고이고 썩은 직원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 없으면 안 되니까 어떻게든 출근해라.
정말 사정상 사람이 없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주로 들었던 '사람이 없다'는 말은 '네가 하던 호구짓을 대체할 호구를 아직 구하지 못했다'는 고인물들의 대표적인 핑계였다. 본인들이 하기 싫은 일을 담당자를 지정해 몰아주기 해야 하는데 그것을 담당하려는 사람은 당연히 없을 수밖에. 그걸 하려는 사람이 없으니 요즘 젊은 것들은 힘든 일을 안 하려고 한다며 열심히 가스라이팅을 하고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치고 고통을 분담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 수가 없다>를 봤다. 어쩔 수가 없다며 고용주로부터 갑작스럽게 해고된 인물의 이야기이다. 해고된 인물은 사회나 고용주 앞에서는 찍 소리도 할 수 없는 평범한 존재다. 그런데 평범한 그가 그의 화살을 같은 노동자들에게 돌리게 되면서 영화는 아이러니를 만들어낸다. 주인공 역시 자신도 어쩔 수가 없다며 상식적이지 못한 행동들을 자행하게 된다.
평생 한 가지만 했던 사람들의 시야는 좁을 수밖에 없다. 제로섬이 아닌, 다양한 대안을 가진 세상을 볼 수 없으니 '어쩔 수가 없다'는 핑계와 합리화만 반복하는 것이다. 영화는 이 기괴한 블랙 코미디를 통해 관객에게 묻는다.
"진짜, 어쩔 수가 없었나?"
[어쩔 수가 없다. 미안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 받은 문자도 똑같았다. 그는 나와의 약속을 잊고 학교장 추천서를 받아놓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학교장 추천 전형으로 교대에 지원서를 내지 못했다. 나는 마감이 몇 시간 남았는데 서류를 낼 수 없다는 게 말이 되느냐고 물었다. 추천서는 직접 제출만 가능한데 지금 출발해도 접수 마감 시간 안에 대학교까지 갈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런 경험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어쩔 수 없다'는 핑계가 정말 싫었다. 나는 다른 대학을 진학했고 다른 진로를 모색해 어느덧 중년의 사회인이 되어 있다. 그리고 영화야말로 다음의 대사로 내게 현명한 답장을 보내준다.
[실직당한 게 문제가 아니라 실직에 어떻게 대처하는지가 문제야]
어쩔 수가 없던 그 사건들 뒤에 내가 무엇을 했느냐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그 어쩔 수 없음을 답습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나는 종종 오래전 방영된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대사를 떠올리곤 한다.
"내 인생에 핑계가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음대 나와서 오케스트라 못 들어간 거, 공무원으로 빠진 거, 엄마 탓, 친구 탓, 후진 선생 탓. 몽땅 다 핑계예요! 내가 그렇게 비겁한 년이라고요."
이런 대사였다. 나에게 필요한 건 역시, 할 만큼 했다는 말이다. 할 만큼 했는데 어쩌라고요. 어쩔티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