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 게임을 해봤어요
"용의 꼬리가 되려고 하지 않는 게 좋아요. 지역을 조금 낮춰서 보는 건 어때요?"
선생님의 조언을 떠올리며 나는 나의 부동산 임장 지도를 옆으로도, 아래로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통된 지 얼마 안 된 지하철역 근처의 3억 이하 아파트 매물을 찾았다. 심지어 신축 아파트였다.
'지도상으로 크게 멀리 간 것도 아닌데 신축 아파트가 이렇게 저렴하다고?'
그 이유가 너무 궁금했던 나는 해당 아파트의 공인중개사에게 연락해 바로 다음날 임장을 갔다.
개발 중인 지역의 신축아파트 임장
지도를 봐서는 크게 흠잡을 것이 없었다. 지하철이 20분에 한 대 꼴이지만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개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매우 쾌적한 지하철을 타고 임장 지역에 도착했다. 네이버 지도 길찾기에 따르면 지하철역에서 도보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신축 아파트였다! 기대가 되었다.
지하철 출구의 새삥 에스컬레이터를 기분좋게 타고 편하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처음 방문한 동네의 신선한 공기를 마셨다. 와. 공기도 좋고 조용했다. 그리고 출구 밖에서 나를 처음으로 맞이해 준 생명체는 인간이 아닌 바로
메뚜기였다. 아스팔트 길을 퐁퐁 날아서 어디론가 뛰어가는 메뚜기를 보니 생경했다. 나는 생각했다. 새로 생긴 역세권이니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어.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네이버 지도가 도보 10분 거리라고 알려준 길을 따라....... 그런데 네이버 지도의 도보 계산법은 신호에 걸리지 않았을 때를 기준으로 한 것 같았다. 사거리의 횡단보도를 한 번 건너고, 아파트 앞 이차선 도로의 횡단보도를 한 번 건너야 하는 길이었다. 그래서 실제로는 5분은 더 걸리는 것 같았다. 마치 그 걸음은 내가 전에 살았던 행복주택 OO마을에서 매일 걸었던 걸음과 비슷했다. 지역은 달랐지만 나는 이 환경의 특성을 대충 알 것 같았다.
나는 이 게임을 해봤어요.
준역세권이라 기뻐하며 입주했던 행복주택이었다. 역 주변에 아파트가 있는 게 맞기는 했는데, 아파트가 있는 방향의 역 출구 주변에만 상권이 거의 없었다. 아파트 주변에도 이렇다 할 건물이 없었다. 양 옆으로 다른 단지들이 공사 중이니 분위기가 바뀌겠다 싶었지만 거주하는 동안 공사 소음과 먼지에만 시달렸지 주변 환경이 좋아진 건 없었다. 새로운 단지들이 생겨난 뒤에도 상권은 크게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역 기준으로 아파트 반대편 출구에 화려한 상권들이 잘 자리 잡았기 때문이었을까.
도보 15분의 함정도 있었다.
단지 앞으로 오는 마을버스 노선이 하나뿐이었는데 배차 간격이 15분이어서 거의 타본 적이 없다. 뚜벅이는 늘 도보 15분 코스를 이용해서 움직여야 하는 집이었다. 태풍이 오나 폭설이 오나 혹한기나 혹서기나 역까지의 도보 15분이 기본값이었다.
마을버스를 타려고 마음을 먹고 집을 나서도, 집에서 마을버스 정류장까지 횡단보도 건너 7분 거리였기 때문에, 역까지 절반을 이미 걸어간 상황에서 마을버스를 타는 건 시간 절약이 되지 않았다.
택시도 거의 오지 않았다. 40도 더위에 짐이 많아 겨우 카카오택시를 잡았는데, 단지 앞에 오신 택시 기사님이 마침 여기까지 온 손님이 있어서 내가 택시를 잡은 거라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임장한 아파트 주변도 내가 살던 곳과 다른 듯 비슷했다. 차들은 낯선 횡단보도를 지나며 때로는 신호를 무시하고 지나다녔다. 단지 앞 마을버스의 배차 간격은 역시 15분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철역까지 걷게 될 준역세권이었다. 재개발 지역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신축 아파트 같았다. 아파트 앞 2차선 도로를 건너면 매우 큰 공터가 있어 미관이 좋지 않았는데 검색해 보니 건설을 앞두고 있는 공장 부지였다. 아파트 근처에는 브랜드가 없는 마트, 빵집, 테이크아웃 커피점 몇 개 외에 눈에 띄는 상권도 없었다.
1군 건설 브랜드 아파트답게 아파트 내부는 잘 되어 있었다. 하지만 술꾼으로 추정되는 세입자를 외출시켜 두고 공인중개사와 둘러본 집 안은 소주병 가득이었다. 동네 분위기에 대해 생각이 많던 차에 그 집의 분위기도 어둡다 보니 우연의 일치 치고는 생각이 많아졌다.
아쉬웠다. 가격도 좋고 연식도 좋은 아파트였기 때문이다. 아파트만을 보고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새삼 깨달았던 경험이었다. 지역을 포기할 수 없다면 결국 가용 예산을 더 높여야 하는 걸까? 고민이 시작됐다.
대출에 집을 맞추려 했는데, 집에 대출을 맞춰 보는 것은 어떨까?
이런 고민을 안은 채로 다른 동네 아파트 임장을 준비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