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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씨 Dec 28. 2023

<연수-장류진 소설집>을 읽고


    역시나. 책을 내려놓기 어렵게 재미있었다. 뭐가 재미있었냐면, 우선 복잡 미묘한 인간의 감정이나 관계가 정말인지 너무나 흥미로웠다.   


    왜인지 모르게 '장류진' 소설하면 잘난(?) 사람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기대하게 된다. 예컨데 판교, 스타트업, 당연히 서울에서 나고 자라 좋은 대학나오고 전문직에 종사하는, 좀처럼 대할일이 없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역시나 이번 소설집에도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묘사되기 힘든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삶에는 교훈따위 없다. 모든 일과 경험에 의미가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자기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대부분 성실히, 가끔은 열정을 다해 그러다 고꾸라지고 남 잘되는 일에 배가 아프기도, 남이 망하는 걸 보며 안도하기도 하는 게 삶이다. 물론 가끔은 위로받기도, 좀처럼 가닿기 힘든 진심을 어설프게 전하기도 하면서 사는 거다.... 라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아무도 안 보는 소설이건 만 쓰는 사람과 쓰기를 꿈꾸는 사람에겐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다. 후자에 속하는 나는 소설을 이렇게나 재미나게 쓰는 작가가 너무나도 부러워지는 거다.

  인상깊은 구절

-나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지를 골똘히 생각했다.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못할 거야. 가사도 모르면서 사람들 앞에서 영어로 노래를 부르는 그런 일은. 어떻게 저렇게 뻔뻔할 수 있지? 대체 무엇이 저 아이를 저렇게 만든 걸까? 이찬휘가 너무 싫어 죽겠는데, 동시에 또 너무 부러웠다. 왜 나는 죽어도 할 수 없는 일을, 저애는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게 된 거지? 어째서?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마음의 차이일 뿐인데, 마음은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왜 내 마음은 대체 이것밖에 안 되는 거야. 무대 위에서 그 애, 찬휘는 여전히 빛났다. ...

 하지만 아무도 그걸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제야 말도 안 되는 영어에 오그라든 내 작은 마음을 펼 수 있었다. 그래, 이 노래는 '돈 스톱 미 나우'랑 '해빙 어 굿 타임'만 알면 되는 노래지 뭐. 어떤 사람은 전부 알아도 쉽게 나서지 못하는데 왜 어떤 사람은 조금만 알아도 다 아는 것처럼 나설 수 있는 걸까. ...(90쪽 <펀펀 페스티벌>)

-... 그런데 왜 나는 천 사장이 음식을 내려놓을 때마다 그 음영을, 클리비지의 시작점을 은근하게 드더냈다고 생각했던 걸까. 왜 그 기억이, 그 음영이, 그 선의 시작 부분이 내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걸까? 그때는 앞치마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니면 허리 아래쪽만 가리는 타입의 앞치마를 맸던 걸까?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어쩌면 당연했다. 너무도 오래전 일이었다. 한 사람의 입맛이 변할 정도로 오래된 시간. 어린아이가 대학을 졸업하고 구직을 할 정도로 오래된 시간. 내 기억이 실제를 왜곡했거나 아니면 과장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뒤이어 그게 아니라 내 모든 기억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게 뭐 어때서? 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고작 그 음영 하나에 시시덕거리고 십수년 간을 들락날락하며 법인카드 갖다 바친 놈들이 한심한 놈들일 뿐. 애초에 거기까지만 싫어했으면 될 일이었다. 152쪽

-"언니 이러는 거, 솔직히 같잖아요."

 언니는 한 손을 나한테 붙들린 채로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나는 언니의 손목을 붙잡고 흔들며 말했다. 

 "언니, 잘 들어요."

 손끝으로 팔딱거리는 미라 언니의 맥이 전해져 왔다.

 "소설 같은 거, 아무도 안 봐요."

 손끝 발끝에 힘주어 간신히 머금고 있던 무언가가 몸밖으로 다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감각이 일었다. 저릿했다. 나는 붙잡고 있던 언니의 팔을 맥없이 놓아버리면서 이어 말했다. 

 "어차피 우리밖에 안 봐요. 여기서 한발짝만 나가면, 아무도 소설 따위 관심 없다고요."

 나는 한쪽 손을 들어 지하철역이 있는 쪽을 허공에 가리켰다. 

 "저기, 육번 출구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한번 물어봐요, 소설을 읽느냐고 말이에요. 그런 걸 묻는다니, 도를 아십니까도 아니고, 정신 나간 사람인 줄 알 거라고요." (328쪽 <미라와 라라>)

5. 어차피 아무도 안 보는 소설이건 만 쓰는 사람과 쓰기를 꿈꾸는 사람에겐 무척이나 중요한 문제다. 후자에 속하는 나는 소설을 이렇게나 재미나게 쓰는 작가가 너무나도 부러워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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