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방학 동안 특별한 일정이 없는 아들과 나는 요즘 격일로 도서관에 다닌다. 집안에서 종일을 부대끼는 것도 힘들고, 도서관에 다녀오면 하루가 금방 지나가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있는 몇 시간 동안 내내 책만 읽는 건 아니다. 아이는 독서와 숙제를 마치고 로비에 앉아 핸드폰을 사용한다. 나도 책을 읽다 지루해지면 서가를 돌며 책 구경도 하고, 공부하는 사람들도 구경(?)하고 PC도 이용한다.
우리 모자와 달리 어떤 초등학생들은 정말 책만 읽거나 공부를 하는 듯 보인다. 부모 혹은 형제와 한 테이블에 앉아 노트 필기를 하거나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면 무척이나 부러운 마음이 든다.
언젠가 아이가 어린이실에서 목격한 장면을 이야기해 주었다. 자기 또래의 아이가 엄청 두꺼운 책을 놀라운 속도로 읽은 후 옆자리에 앉은 아빠가 묻는 질문(아마도 방금 읽은 책에 관한)에 척척 대답도 잘 하더란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이 들었냐 물으니 “참, 신기한 아이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라고 아이가 답했다. 해줄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아 “너도 참 신기한 아이야.”라고 말해주었다.
가끔 우리는 음료를 마시거나 간식을 사 먹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도서관을 벗어나기도 한다. 도서관 건너편에는 학원가가 조성되어있다. 수학, 영어, 국어, 과학 등 거의 모든 교과목 전문학원과 피아노, 태권도, 줄넘기, 미술 등 예체능까지 섭렵하고 있어 간판을 바라보면 사교육 백화점에 와있는 기분이 든다. 건물 앞에는 원생들이 주차한 자전거가 가득하고 점심때면 식당마다 끼니를 해결 중인 아이들로 북적인다.
오랜만에 접한 ‘낯선 풍경’에 처음엔 신기해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음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지난 2년 동안 꾸준히 놀았고, 앞으로 초등학교 졸업하기까지 2년을 더욱 열심히 놀 작정인 아이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이렇게 마냥, 놀아도 되는 걸까?
그런 마음에서인지 갑작스레 영어학원 상담 예약을 잡았다. 독서를 바탕으로 한 어학원이었다. 사용하는 프로그램과 원비에 대한 간단한 안내일 줄 알았는데, 아이는 꽤 오랜 시간 레벨테스트를 받고 돌아왔다.
아이의 수준은 뭐, 내가 예상한 정도였다. 뭐, 학습이란 걸 해본 적이 없으니. 상담 교사는 집에서 읽는 책의 난도를 조정(물론, 쉬운 단계로)할 것을 권유한 후 수업 방식에 대한 안내를 이어갔다. 아이는 학원에 등록함과 동시에 영어책 읽기는 물론 수준에 맞는 어휘 암기와 단어 테스트, 독해/문법 교재 풀이 등 본격적인 영어 공부를 하게 될 터였다.
주 3회 두 시간의 수업 시간 외에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이 소요되는 숙제 시간까지. 갑작스런 레벨테스트를 마친 후 지루함에 몸을 배배 꼬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마음이 복잡해졌다. 아들아, 넌 숙제와 공부의 바다에 빠질 준비가 되어있니? 그것도 비자발적으로 말이야.
당장 학원 수강을 결정하긴 쉽지 않았다. 3월에 다시 농촌 유학을 위해 화순으로 돌아갈 예정이고, 겨우 한 달 학원을 체험하는 게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이다. 아이도, 나도 본격적인 학습에 준비가 되어있지 않음은 물론이다.
집에 돌아와 아이에게 공부 시간을 늘려볼 것을 권했다. 문제집 풀이 등 새로운 공부 방식도 제시했다. 여느 때처럼 아이는 두 번 생각지 않고 그러마, 쉽게 대답한다. 학원이든 집에서 하는 공부든 아이에게 ‘비자발적’이긴 마찬가지다.
공부는커녕 좋았던 관계마저 망가지는 건 아닌지, 열심히 학원비를 대는 게 이 시대 부모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닌지, 도대체 아이 스스로 공부하고자 하는 마음은 언제 생기는 건지, 놀 것 다 놀고 공부도 놓치지 않겠다는 건 허무맹랑한 꿈은 아닌지, 모든 게 너무 어렵다. 화순을 떠난 지 닷새 만에 그간 키워 온 교육에 대한 주관은 이렇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간의 경험을 돌아보건대, 교육에 관해 엄마 혼자만 비장하면 역효과만 불러오기 십상이다. 심각한 표정을 풀고 티 나지 않게 아주, 조금만 애를 써보기로 한다. 과하지 않게, 아이가 눈치채지 않게. (왜 나만 애써야 하는 거냐구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