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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모씨 Mar 26. 2024

<미나리>

 주말 아침 눈을 뜨니 평소와 같은 시각, 다섯 시 사십 분이었다. 알람을 맞춰 놓은 것도 아닌데 정확히 '그' 시간에 일어나다니. 알게 모르게 이른 출근 시간에 대해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나보다.

 그대로 누워 인터넷 기사를 몇 개 읽다가 거실로 나왔다.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는데 일어난 지 두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영화를 보면 뭐라도 남겠지 싶어 선택한 건 <미나리>였다.

 우선, 내가 좋아하는 스티븐 연이 나온다. 한국인 이민 가족의 가장 역할을 맡은 그는 여전히 멋졌다. 




 영화를 보곤, 짧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정도는 다르지만 어떤 형태로든 '가족'이란 것은 각자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는 것. 가족으로 묶이면 원하지 않는 책임과 역할이 생긴다. 때로는 누군가의 잘못이나 실수를 '연대' 책임지어야 할 일도 생긴다. 영화 속에서 몸이 불편한 할머니로 비롯된 화재는 고스란히 남은 가족의 몫이 될테다. 

 

 얼마 전 읽은 댓글 하나가 기억 난다. OECD국가 중 한국이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자살률에 대한 기사에 달린 댓글이었다. 예전에는 자살이라는 선택이 남은 가족에게 폐가 될까봐 망설였는데, 이제는 가족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 민폐이고 사라져주는 것이 미덕이기 때문에 자살을 선택한다는 매우 비정한 의견이었다. 

 

 영화로 돌아가 창고를 태우고 만 할머니 이야기를 다시 해보련다. 화재 현장에 도착한 딸과 사위는 농작물을 구하기 위해 창고로 뛰어든다. 그들이 십년 간 병아리의 암수 구별을 하며, 도시를 떠나 친구 하나 없는 깡촌에 정착해 가며 키워온 꿈이 이제야 손에 잡힐 듯 한 순간이었는데, 그게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가족 구성원의 선의에서 비롯된 실수로 인해서. 

 창고가 불타는 광경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다 할머니는 정처없이 길을 걷는다. 그런 할머니에게 '우리 집은 저쪽이라며' 할머니를 붙잡은 건 또 다른 가족, 손자와 손녀였다.  


 가족이란 뭘까. 언젠가부터 가족에게마저 최고와 최선의 모습을 보여주고 어떤 피해도 끼치지 않는 걸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온 건 아닌가 싶다. 남들에게 그렇듯이 어떠한 민폐도 피해도 끼치지 않는, 서로의 이익을 도모하는 관계, 그런 가족.

 쓰고 보니 매우 비정하구나. 


 여기까지 쓰고 일찍 잠자리에 들기 위해 샤워를 하러 갔다. 뜨거운 물줄기를 맞으며 거품을 내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제이콥은 결국 농장 경영에 성공할 것이고 그들의 자녀는 미국 사회에서 승승 장구하리라 하는 예상이 그것이다. 아마도 딸(앤)은 하버드 대학에 진학해 아이비리그 종신 교수쯤 될 것이며 미워할 수 없는 장난 꾸러기 막내(데이빗)는 자전적 이야기로 장편 영화 감독으로 데뷔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쯤은 오르리라. 가족 중 그 누구도 자살을 하거나, 가족 구성원을 평생 원망하며 뿔뿔히 흩어져 사는 일 따위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제멋대로 상상을 펼쳐본다.


 영화의 말미에 할머니가 옮겨 심은 미나리를 따는 제이콥과 데이빗의 모습에서 이 모든 상상은 비롯되었다. 적어도 그들 부부는 젊으며 그들에겐 아이와 이루고 싶은 꿈 그리고 '땅'이 있었다. 남들이 알아보지 못한 비옥함을 알아보고 제이콥은 그 땅에 모든 걸 쏟아 부었다. 그들은 시련을 함께 겪었고 단단해졌다. '가족'이라는 건 물질과 경제 논리로만 설명되는 게 아니다. 가족이란, 가족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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