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희노애락

by 김모씨

1. 기쁨


오랜만에 술 약속이 있어 남편의 귀가가 늦었다. 새벽 두 시가 넘어 들어온 남편. 곧장 방으로 직행해 잠자리에 들지 않고 거실에서 한참 뭔가를 뒤적인다. 택배로 도착한 가습기 박스를 열어 나와 아들이 잠든 방에 설치를 해주고서야 자러간다.

예전에 아이가 원해서 달팽이를 키운 적이 있었다. 의외로 달팽이는 손이 많이 가는 애완동물이었다. 남편은 술 취해 들어오면 달팽이집을 깨끗이 청소해주고 먹이도 새로 넣어주곤 했다.

잠귀가 밝은 나는 잠자는 척 남편이 뭘 하는지 가만히 듣곤 한다. 술 먹고 늦은 밤 귀가해 가족을 위해 뭔가를 하며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는 남편은 참 사랑스럽다.


2. 노여움


시작은 버거움이었다. 오전에 일정이 있는 날은 오후에 쉬어야 한다. 어제 그러지 못했다. 아이는 엄마가 수영 수업에 와서 봐주길 원했다. 읽어야 하는 책을 덮고 수영 수업을 참관하러갔다. 수업 후엔 며칠 전부터 발등이 불편하다는 아이를 데리고 정형외과를 찾았다. 아이가 꾀병을 부리는 것 같아 심기가 불편했다. X-ray촬영을 마치고 아이가 평발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물리치료까지 받고 8시가 지나서야 집에 도착했다. 서둘러 저녁을 하고 일과를 마쳤다. 읽어야 할 책도 못 읽고, 글도 못쓰고 잤다.

어제 못한 걸 벌충하려고 오전부터 허둥댔다. ‘매일 열심인 것 같은데 왜 난 모든 게 밀려있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주말에 읽을 책을 대출하러 두 군데 도서관에 걸쳐 도착한 집은 폭탄 맞은 상태이고 때마침 저녁 식사 준비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나에 대한 노여움은 아이에게 전달되고 말았다. 비난 섞인 짜증으로.


3. 슬픔


쉬고 싶어서 텔레비전을 틀었다. <한국인의 밥상>이 하고 있었다. 매우 좋아하는 프로그램이다. 진행자인 최불암 할아버지가 몇 가구를 돌아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소개해 주는데 마지막에 소개된 집을 보면서 엄청 울고 말았다.

자녀들에게 줄 된장을 담그기 위해 콩을 다듬는 86세의 할머니가 나왔다. 홀로 사는 할머니의 막내아들은 종종 엄마의 집을 방문한다. 45세의 막내아들은 평범하게 집안에 들어오는 법이 없다. 일하는 엄마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다가와 엄마의 어깨나 무릎에 손을 스윽 얹어 놓는다. 그럼 할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아들은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천진난만하게 웃는다.

몇 해 전부터 막내아들은 엄마의 집 곳곳을 고치는 중이다. 겉으로 보기엔 아주 오래된 시골집인데 내부는 요즘 아파트 못지않다. 헛간을 개조해서 넓은 창을 내고 조명을 달아 멋진 공간을 만들었다. 어느 해 겨울인가 고장이 난 보일러를 수리하려던 아들은 보일러가 고장난 게 아니라 돈을 아끼기 위해 엄마가 보일러를 장기간 사용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마흔 다섯 살 난 아들이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는 일이 두렵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나도 펑펑 울고 말았다.

‘우리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돌아볼 때’라는 최불암 할아버지의 내레이션을 들으며 지금 엄청 잘못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없이 슬퍼졌다.


4. 즐거움


다행히 저녁 독서시간은 지켰다. 다시 읽는 <나목>을 연애소설처럼 읽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경와 황태수, 옥희도의 이야기로 가슴이 저릿하게 아파왔다.

소설을 영화로 만든다면 누구를 캐스팅할까 즐거운 고민을 해본다. 찰떡같이 어울리는 배우들을 찾는데 성공했다. 만족스런 가상캐스팅으로 오늘 하루는 즐거움으로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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