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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하루만 Sep 05. 2018

일상의 순간을  감정쓰레기로  막아버리는 사람

  

개수대에 물이 차올랐다. 하수구가 막혔나 보다. 좀 전에 헹구어 낸 김치통 때문이었다. 개수대에 차오른 벌건 물 속에 손을 푹 담그고 배수구망을 싹싹 훑어낸다.  


구멍을 막고 있던 약간의 음식물 쓰레기와 고춧가루를 박박 긁어냈다.긁어내자마자 물이 쭉 빠져나가 속이 다 후련했다. 작고춧가루지만 그게 모이면 이렇게 '물이 빠져나갈 구멍'을 막는다.          



원이(가명)가 속상해서 눈물닦던 휴지가 남았는지, 그 휴지에 그림을 그렸다.


일요일 아침이다.

남편은 거실 바닥에 물감을 묻히면 어떻게 하냐며 붓을 들고 있는 딸아이에게 신경질을 냈다.


"닦으면 되지. 왜 화를 내?"

입을 삐죽이며 답하는 아이에게 남편은 오후에 나가기로 한 약속을 무기인양 들이댄다.


"너 이거 빨리 안 치우면 안 데리고 갈 거야. 네가 알아서 가."

남편은 애한테 소리 지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자니 문득, 설거지통에 물이 차오르는 환상을 본 듯했다. 설거지통 속에서 허우적대는 쪽파 조각처럼 난 힘이 빠졌다. 

'저게 아빠 맞나?' 라는 생각에. 

왜 괜히 그림그리고 있는 애한테 다짜고짜 신경질부터 내나 싶은 마음에. 

쫓아가서 뒤통수를 한대 갈기고 싶은 욕구때문에 힘 빠졌다. 


가슴팍으로는 속상해서 울먹거리는 딸아이를 달래고, 머리로는 남편에게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지 타진하고 있었다.      


딸아이가 얼마나 속상해하는지 문자로 차근차근 알릴까?
전화해서 들어와 당장 사과하라고 악을 써볼까?
당신이 아이와 싸우는 게 이젠 지긋지긋하다고 호소할까?
어른이 아이에게 감정을 쏟아내는 건 부끄러운 짓이라고 알려줄까?     


내 머릿 속에서 돌아다니는 해결책 비스므리한 것들은 전부 남편 입장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시 지우고 남편 입장만 생각했다.     

자신과 37년 차이나는 아이에게 감정쓰레기를 던진 남편 마음은 어떨까?
기분 좋을까? 행복할까?
후련한가? 창피할까?
그게 힘들다는 걸 알까?   


기분이 좋다면 사이코패스일 테고, 힘들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내 전두엽은 남편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게 강아지 목줄을 쇠막대에 걸어놓듯 붙들어 매 놓고, 힘 빠진 몸을 일으켜 세우고 주방에서 점심을 준비했다.


어느새 1시간이 지났고, 아직 들어오지 않은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디냐 뭐하냐고 애한테 뭔짓이냐' 라고 썼다 지웠다를 세 번쯤 반복한 후 짧게 보냈다.     


'자기야. 힘들지? 와서 밥 먹자.'

     

썼다 지웠다는 반복하며 남편의 마음을 다독이는 듯한 문자에 대한 답이었을까? 5분 뒤에 현관문이 열렸다. 들어오자마자 남편은 딸아이에게 쭈뼛거리며 다가가 사과를 한다. 딸아이 방문을 빼꼼히 열며.


"아까 아빠가 괜히 신경질 부리고 말을 함부로 해서 미안해."

"어? 음.. 알았어"


딸아이는 예상치 못한 아빠의 반응에 약간 당황했지만, 그 순간 다 털어낸 듯한 표정이었다. 남편도 조금은 머쓱한 표정으로 식탁에 와 앉는다. 사과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남편 입장에선 '기적' 같은 순간이었다.    

 

"사과했어? 멋진 아빠네"      


칭찬과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밥그릇을 남편에게 건네며 나도 안하던 말을 했다. 사실 마음 속 깊은 곳에선 '그러고도 밥이 넘어가냐, 니가 아빠냐 그래도 용케 사과는 했네!' 라는 말이 올라올까 말까 꿀렁대는 듯 했다. 이 말을 내뱉어야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았지만. 아이가 듣고 있으니까~ 라는 생각에 나도 용케 잘 참아냈다. 

이런 말은 쉽게 습관이 되어버리니까. 


딸아이 마음을 속상하게 한 못난 아빠라생각했던 내 생각을 내려놓고, 남편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계곡물 흘러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원이는 속상하면 자기방으로 들어가 그림을 그린다. '낚시줄과 물감으로 표현한 소나무'



당신과 나의 일상에서 풀어내지 못한 순간들이 쌓이면 그건 고춧가루처럼 모이고 모여서 반드시 당신과 나의 숨구멍을 막는다. 당신과 나 사이에 막혀있는 숨구멍을 뚫지 못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감당하기 어려워질거다. 쪽파 대가리가 둥둥 떠다니는 개수대 물처럼.     


그래서 오늘도 부딪히고 한숨 쉬고 웃고 각자 돌아보며 막힌 구멍을 뚫어낸다. 당신과 나 사이에 숨구멍이 열려야 아이들도 숨쉬기 편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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